눈을 뜨자마자 복잡한 환경속에서 다양한 대상들과 마주쳐야 하는 도시
일상인들의 하루는 피곤하다.

과중한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 갈수록 심해지는 교통체증, 공해로 얼룩져
가는 대도시의 삶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삶의 질을
누리려는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욕구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권리가 무참히 침해
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눈을 감고는 살수 없는 세상이기에 어쩔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시각 공해"일 것이다.

현대 문명 사회속에서 도시의 삶은 날로 메말라가고 있다.

안목과 비전의 부재 속에서 짧은 세월동안 개발로 치달아 온 우리의 도시
계획문화는 선진국의 그것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고 무질서하다.

아름답지 못한 형태로 조화와 굽혀감이 무지된 채 난립해 있는 빌딩들,
목을 조르듯 답답하고 획일적인 잿빛 박스 형태의 아파트 단지, 빌딩 앞
곳곳에 처량하게 세워져 있어 "환경조각"이라는 단어가 무색해 지는 환경
조각물들.

이 모든 시각적 대상들은 우리 도시인의 정서를 순화시키지 못하고 더욱
척박해지게 만든다.

여기에 결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또 하나의 "공해 분자"는 바로 건물
벽면과 둘레에 추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간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돌출간판은 건물 한쪽 모서리에만 설치 가능하다든가,
벽면 간판의 경우 건물의 한쪽 벽면에만 부착가능하다든가 하는 "간판
규제법"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이 개개의 간판들이 결코 곱게 보아줄수 없는 흉한
모습과 무질서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것이 보는 이에게 심한 시각적
피로를 유발시킴으로써 정신적 피해마저 야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인구가 밀집한 아파트 단지의 상가나 중소 규모의 건물벽면에 난립한
간판들을 보노라면 바로 저것이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단면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벽면의 여백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저마다의 크기와 조잡한 형태를
주장하며 빼곡이 들어찬 간판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질서없이 먼저타고
내리려는 새치기 승객들을 연상시킨다.

타인을 전혀 배려치 않고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이 자신의 목소리만을
감정적으로 드높이는 독선적 이기주의자의 무모함과 무엇이 다른가.

사실 우리 한국인의 생활 수준도 이제 비약적으로 향상되어서 양의 추구
에서 질의 추구로 삶의 패턴이 변하고 있다.

보다 여유있게 자신의 개성과 취향이 반영된 "질"과 "다양성"의 문화가
우리 삶의 지향점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우리의 변화된 삶의 패턴을 인식한다면 간판의 주인들도 자신들의
원시적인 "호객 방법"이 얼마나 시대 착오적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이 이 곱지못한 시각공해의 주범인 간판들로부터
하루빨리 해방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간판 주인들의 안목과 의식수준이
향상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심미적 차원에서 간판의 서체, 색깔, 크기,
위치 등에 대한 보다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규정을 강화시킴으로써
그 규정을 만족시키는 간판만을 부착하게끔 하루빨리 행정적인 체계로서
그 방향을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척박한 도시 간판의 숲속에서 그래도 가끔씩 우리에게 조형적 즐거움을
안겨주며 시선을 끄는 것은 대부분 외국 수입브랜드나 프랜차이즈 스토어의
간판들이다.

이제 세상은 무한 경쟁의 시대다.

진정한 세계화는 작은 간판하나라도 철저한 안목과 계산으로 붙일줄 아는
의식과 합리성으로부터 출발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