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1864~1951)은 19세기말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추적
활동을 한 개화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만 전개했던 독립운동은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민족 전체에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오히려 한국인들에게는 갑신정변의 실질적 행동대원이었으며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활동을 통해 대중 계몽에
앞장섰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서재필을 "한국의 볼테르"라고 일컫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3일만에 실패한 뒤,겨우 살아남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6년초 미국시민 필립 제이슨이 되어 12년만에 귀국했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이 민중의 성원 없이 일본에만 의존하려 했던
위로부터의 혁명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귀국한 뒤 2년반
동안 민족자주 민주주의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 개화사상을 대중화시키는데
진력한다.

그는 "독립신문"사설이나 만민공동회의 토론을 통해 천부인권과
만민평등을 내세웠다.

여성을 천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폈다.

관리들은 "백성의 종"임을 역설했다.

주권재민의 민주정치사상도 천명했다.

선거에 의한 관리 선출도 강조했다.

당시 절대군주사회에서는 입도 뻥긋해서는 안될 위험한 주장들이었지만
그는 미국시민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화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친로수구 내각이 들어서면서 "독립신문"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어버리고 중추원 고문직을 박탈하자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동안 "외세와 결탁한 정권 탈취의 음모"라든가 "개혁을 지향한
실패한 쿠데타"였다는 등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때마다
서재필에 대한 평가도 오르락 내리락했다.

특히 기독교만이 참종교라든지 서구문화는 무엇이든지 우월하다는
그의 편벽된 논리와 냉혹하고 거만했던 자존자대의 성품은 항상 그의
부정적 측면으로 거론되고 있어 아쉽다.

제40회 신문의 날이기도 한 오는 7일은 "독립신문"창간 10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문체부는 서재필을 "4월의 문화인물"로 정하고 갖가지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우리는 서재필이 개화운동을 시작했던 19세기말만큼 미래예측이 힘들고
새로운 변혁이 요구되는 20세기말에 살고 있다.

그의 사상과 활동을 재음미해 역사적 교훈과 암시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