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3) 김맹수 <홍콩 '신라식품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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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전부터 동서양의 문물이 만나는 접점이었던 홍콩.
그래서 ''동양속의 서양''이라고도 불리는 홍콩은 쇼핑의 천국이면서
''식도락가의 천국''이기도 하다.
항구도시의 특성상 동서양의 온갖인종이 몰려들면서 음식문화 또한
그 인종수만큼이나 만개했기 때문이다.
이런 홍콩에서 신라식품공사 등 4개 업체를 꾸려가고 있는 김맹수
사장(44).
현지 교민들은 그를 "한국식품의 전도사"라고 부른다.
불과 10년전만해도 한국식품의 불모지였던 홍콩시장에 김치와 라면 등을
소개해 한국식품이 "국제음식"으로 뿌리내리게 만든 1등 공로자가 바로
김사장이기 때문이다.
전북 이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던 김사장이
홍콩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80년12월.
홍콩에서 무역과 요식업을 하고 있던 선배의 "같이 일해보자"는 권유에
의해서였다.
선배가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간 김사장은 이런 일 저런 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땀을 쏟았다.
그런 김사장을 1년남짓 지켜본 선배는 이번에는 김사장에게 독립할 것을
권유했다.
조그맣게 무역업을 시작한 김사장에게는 후원자들이 많았다.
선배회사에서 일하면서 인연을 쌓은 거래선들은 그의 성실성을 인정해
적극적으로 도음을 줬다.
여기에다 때마침 크게 붐을 타던 중동지역에 진출한 한국업자들과 무역
거래를 해 제법 재미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한창 사업에 재미를 붙여가던 그즈음 첫번째 시련이 닥쳐왔다.
중동쪽의 파트너가 대금을 몽땅 떼어먹고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
이 바람에 그는 순식간에 알거지 신세가 되다시피했다.
"다 때려 치우고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마저도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간대도 그를 받아줄 직장이 쉽게 찾아질리 만무했다.
이를 악다문 그는 행상에서부터 잡역부까지 닥치는대로 돈벌이에 나섰다.
하지만 무엇하나 되는 일이 없어 고달프기만 한 시련의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기를 수년.
마침내 그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지닌 타고난 성실성과 신용, 그리고 결코 좌절하지 않는 투지를
높이 산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어 86년 홍콩의 침샤추이지역에 조그만
한국식품점을 열게 된 것이다.
식품점이라고는 해도 실상은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규모였다.
하지만 신용을 바탕으로 워낙 억척스럽게 장사를 한 덕택에 사업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김사장의 사업이 본격적인 기업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선식
사업에 손을 대면서부터였다.
세계굴지의 국제항인 홍콩항에는 한국 화물선 또는 한국선원이 승선한
외국 화물선이 하루에도 수십척씩 입항한다.
이들은 한번 입항할 때마다 선원들이 먹을 주부식을 구입해 갔는데 그
물량이 종전의 식품점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선박 1척당 식품 구입액이 적게는 수천달러 많게는 1만달러를 넘었다.
일단 그가 선식사업에 나서자 식품점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선원들이
그의 가게로만 모여들었다.
그의 가게에서는 물건값에 바가지가 없었고 무엇을 주문해도 물량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문받은 물건을 직접 소형 운반선에 싣고가
정확하게 배달해 주었다.
자연히 경쟁업체들이 하나 둘 문을 닫게 되어 그는 선식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도 여러 척의 선박에 납품을 하다보니 매출액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김사장은 사업가로서 확실한 기반을 닦게 됐다.
김사장이 갖고 있는 사업가로서의 야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교민이나 선원만을 상대로 해온 사업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이제는 중국 일본인등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식품을 팔아보자는 구상을 하게
됐다.
한마디로 "한국식품의 국제화" 가능성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음식문화에 대한 인지도가 워낙 낮아 섣불리 손을 대기는
어려웠다.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서울을 다녀온 홍콩인 단체관광객들이
"신라면"을 박스째 사들고 귀국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때마침 불어닥친 엔고 현상도 이제 때가 왔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현지인들이 오랫동안 즐겨온 일본식품의 가격이 크게 올라 가격면에서도
한국식품이 경쟁력을 갖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94년 봄 그는 "신라면"과 "종가집김치"를 수입판매하기 시작했다.
한데 당초 기대와는 달리 판매는 극히 부진했다.
김치의 경우 쉽게 변질되는 바람에 파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많을 정도
였다.
"판매가 부진했던 이유는 한국식품에 대한 현지인들의 신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식품은 값이 비싸도 일본제니까 당연히 좋은 품질일 것으로 생각
하는데 비해 한국식품은 품질부터 믿을 수 없을 뿐더러 값도 훨씬 싸야
된다는게 현지인들의 인식이었다"
원인분석이 끝나자 처방은 곧바로 나왔다.
김사장은 일본식품과 한판 승부를 걸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본격적인 판촉활동에 나섰다.
유능한 현지인 세일즈맨을 스카웃해서 대형 슈퍼마켓을 순회하면서
시식회를 개최했고 TV및 신문 잡지광고 등을 통해 한국식품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작전을 폈다.
처음에는 판매의 선봉에 서야할 현지인 직원이나 세일즈맨들 조차
한국식품에 대한 인식이 낮아 그의 이런 전략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선 현지인 직원과 세일즈맨들을 한국에 데리고 가서
식품생산공장과 식품유통업체들을 며칠씩 견학시키는 방법으로 인식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김사장이 운영하는 사업체는 신라식품공사
신라유한공사 신라선식유한공사 신라초급시장유한공사등 4개로 늘어났다.
이들 회사는 현재 홍콩에서 구매기준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웰컴 슈퍼마켓과
파킹숍을 위시한 일본계 백화점 식품부등에 250여개의 매장을 갖고 한국
식품을 판매하고 있다.
김사장이 현지시장에 내놓고 있는 한국식품은 라면류와 종가집김치
하림삼계탕 하이트맥주 등 10여종.
판매량은 라면이 월간 컨테이너(40피트기준) 10~12개, 김치가 건테이너
(20피트기준) 1개 정도에 이르고 있다.
4개의 신라식품그룹에서 일하는 직원은 모두 27명으로 한국인 5명
홍콩인 15명 필리핀인 6명 파키스탄인 1명 등으로 다국적이다.
1인당 매출액도 2억원을 웃돌아 식품상치고는 엄청 높은 편이다.
이렇게 힘겹게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그는 모국의 업체들로부터
섭섭한 일을 당한 적도 있었다.
애써 시장기반을 닦아 놓았는데 한국의 모업체까지 유사제품으로 유통
질서를 마구 흐려놓았던 것.
김사장이 수입판매하는 신라면이 현지에서 크게 인기를 끌자 국내 다른
라면회사가 OEM이라는 미명하에 "신랄라면"이라는 유사상표로 홍콩시장에서
가격덤핑행위를 했다.
이 상품은 포장도 신라면과 아주 유사한데다 상품명도 김사장의 신라식품과
비슷해 김사장은 큰 낭패를 봐야했다.
"일본식품과 경쟁하기도 힘에 겨운데 한국업체가 유사상표로 상품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는 김사장은 요즘도 틈만나면 "이제
한국업체끼리의 치졸한 경쟁은 그만두어야 할때"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의 이런 자세는 평소 그의 생활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지만 그렇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챙기는 "천민자본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게 그의 신조다.
그래서 김사장은 교민회나 한인상공인회 향우회등 한국인들끼리 모이는
각종 모임에 빠지는 법이 없다.
또 골프모임이나 술자리를 통해 주변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좋아한다.
한국식품으로 홍콩사람들의 입맛을 바꾸어놓은 김맹수사장.
이제 그의 고객은 한국교민만이 아니다.
오히려 주고객은 640만 현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과 일본인들
이다.
그러나 김사장의 야심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멀지않은 장래에 한국식품을 가지고 광동성을 비롯한 중국본토시장을
공략해보겠다는 꿈도 가꾸고 있다.
또 지금은 한국식품만을 취급하고 있지만 앞으로 품목을 늘려 한국산
생활용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대형 마켓을 설립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홍콩경제가 중국으로의 귀속을 앞두고 그 장래에 명암이 엇갈리고 있는
속에서도 이렇게 정력적으로 뛰고 있는 김사장이야말로 세계화시대에
한국인이 지향해야 할 "개척자상"이라는게 주변인들의 평가다.
< 임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일자).
그래서 ''동양속의 서양''이라고도 불리는 홍콩은 쇼핑의 천국이면서
''식도락가의 천국''이기도 하다.
항구도시의 특성상 동서양의 온갖인종이 몰려들면서 음식문화 또한
그 인종수만큼이나 만개했기 때문이다.
이런 홍콩에서 신라식품공사 등 4개 업체를 꾸려가고 있는 김맹수
사장(44).
현지 교민들은 그를 "한국식품의 전도사"라고 부른다.
불과 10년전만해도 한국식품의 불모지였던 홍콩시장에 김치와 라면 등을
소개해 한국식품이 "국제음식"으로 뿌리내리게 만든 1등 공로자가 바로
김사장이기 때문이다.
전북 이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던 김사장이
홍콩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80년12월.
홍콩에서 무역과 요식업을 하고 있던 선배의 "같이 일해보자"는 권유에
의해서였다.
선배가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간 김사장은 이런 일 저런 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땀을 쏟았다.
그런 김사장을 1년남짓 지켜본 선배는 이번에는 김사장에게 독립할 것을
권유했다.
조그맣게 무역업을 시작한 김사장에게는 후원자들이 많았다.
선배회사에서 일하면서 인연을 쌓은 거래선들은 그의 성실성을 인정해
적극적으로 도음을 줬다.
여기에다 때마침 크게 붐을 타던 중동지역에 진출한 한국업자들과 무역
거래를 해 제법 재미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한창 사업에 재미를 붙여가던 그즈음 첫번째 시련이 닥쳐왔다.
중동쪽의 파트너가 대금을 몽땅 떼어먹고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
이 바람에 그는 순식간에 알거지 신세가 되다시피했다.
"다 때려 치우고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마저도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간대도 그를 받아줄 직장이 쉽게 찾아질리 만무했다.
이를 악다문 그는 행상에서부터 잡역부까지 닥치는대로 돈벌이에 나섰다.
하지만 무엇하나 되는 일이 없어 고달프기만 한 시련의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기를 수년.
마침내 그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지닌 타고난 성실성과 신용, 그리고 결코 좌절하지 않는 투지를
높이 산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어 86년 홍콩의 침샤추이지역에 조그만
한국식품점을 열게 된 것이다.
식품점이라고는 해도 실상은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규모였다.
하지만 신용을 바탕으로 워낙 억척스럽게 장사를 한 덕택에 사업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김사장의 사업이 본격적인 기업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선식
사업에 손을 대면서부터였다.
세계굴지의 국제항인 홍콩항에는 한국 화물선 또는 한국선원이 승선한
외국 화물선이 하루에도 수십척씩 입항한다.
이들은 한번 입항할 때마다 선원들이 먹을 주부식을 구입해 갔는데 그
물량이 종전의 식품점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선박 1척당 식품 구입액이 적게는 수천달러 많게는 1만달러를 넘었다.
일단 그가 선식사업에 나서자 식품점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선원들이
그의 가게로만 모여들었다.
그의 가게에서는 물건값에 바가지가 없었고 무엇을 주문해도 물량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문받은 물건을 직접 소형 운반선에 싣고가
정확하게 배달해 주었다.
자연히 경쟁업체들이 하나 둘 문을 닫게 되어 그는 선식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도 여러 척의 선박에 납품을 하다보니 매출액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김사장은 사업가로서 확실한 기반을 닦게 됐다.
김사장이 갖고 있는 사업가로서의 야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교민이나 선원만을 상대로 해온 사업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이제는 중국 일본인등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식품을 팔아보자는 구상을 하게
됐다.
한마디로 "한국식품의 국제화" 가능성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음식문화에 대한 인지도가 워낙 낮아 섣불리 손을 대기는
어려웠다.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서울을 다녀온 홍콩인 단체관광객들이
"신라면"을 박스째 사들고 귀국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때마침 불어닥친 엔고 현상도 이제 때가 왔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현지인들이 오랫동안 즐겨온 일본식품의 가격이 크게 올라 가격면에서도
한국식품이 경쟁력을 갖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94년 봄 그는 "신라면"과 "종가집김치"를 수입판매하기 시작했다.
한데 당초 기대와는 달리 판매는 극히 부진했다.
김치의 경우 쉽게 변질되는 바람에 파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많을 정도
였다.
"판매가 부진했던 이유는 한국식품에 대한 현지인들의 신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식품은 값이 비싸도 일본제니까 당연히 좋은 품질일 것으로 생각
하는데 비해 한국식품은 품질부터 믿을 수 없을 뿐더러 값도 훨씬 싸야
된다는게 현지인들의 인식이었다"
원인분석이 끝나자 처방은 곧바로 나왔다.
김사장은 일본식품과 한판 승부를 걸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본격적인 판촉활동에 나섰다.
유능한 현지인 세일즈맨을 스카웃해서 대형 슈퍼마켓을 순회하면서
시식회를 개최했고 TV및 신문 잡지광고 등을 통해 한국식품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작전을 폈다.
처음에는 판매의 선봉에 서야할 현지인 직원이나 세일즈맨들 조차
한국식품에 대한 인식이 낮아 그의 이런 전략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선 현지인 직원과 세일즈맨들을 한국에 데리고 가서
식품생산공장과 식품유통업체들을 며칠씩 견학시키는 방법으로 인식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김사장이 운영하는 사업체는 신라식품공사
신라유한공사 신라선식유한공사 신라초급시장유한공사등 4개로 늘어났다.
이들 회사는 현재 홍콩에서 구매기준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웰컴 슈퍼마켓과
파킹숍을 위시한 일본계 백화점 식품부등에 250여개의 매장을 갖고 한국
식품을 판매하고 있다.
김사장이 현지시장에 내놓고 있는 한국식품은 라면류와 종가집김치
하림삼계탕 하이트맥주 등 10여종.
판매량은 라면이 월간 컨테이너(40피트기준) 10~12개, 김치가 건테이너
(20피트기준) 1개 정도에 이르고 있다.
4개의 신라식품그룹에서 일하는 직원은 모두 27명으로 한국인 5명
홍콩인 15명 필리핀인 6명 파키스탄인 1명 등으로 다국적이다.
1인당 매출액도 2억원을 웃돌아 식품상치고는 엄청 높은 편이다.
이렇게 힘겹게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그는 모국의 업체들로부터
섭섭한 일을 당한 적도 있었다.
애써 시장기반을 닦아 놓았는데 한국의 모업체까지 유사제품으로 유통
질서를 마구 흐려놓았던 것.
김사장이 수입판매하는 신라면이 현지에서 크게 인기를 끌자 국내 다른
라면회사가 OEM이라는 미명하에 "신랄라면"이라는 유사상표로 홍콩시장에서
가격덤핑행위를 했다.
이 상품은 포장도 신라면과 아주 유사한데다 상품명도 김사장의 신라식품과
비슷해 김사장은 큰 낭패를 봐야했다.
"일본식품과 경쟁하기도 힘에 겨운데 한국업체가 유사상표로 상품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는 김사장은 요즘도 틈만나면 "이제
한국업체끼리의 치졸한 경쟁은 그만두어야 할때"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의 이런 자세는 평소 그의 생활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지만 그렇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챙기는 "천민자본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게 그의 신조다.
그래서 김사장은 교민회나 한인상공인회 향우회등 한국인들끼리 모이는
각종 모임에 빠지는 법이 없다.
또 골프모임이나 술자리를 통해 주변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좋아한다.
한국식품으로 홍콩사람들의 입맛을 바꾸어놓은 김맹수사장.
이제 그의 고객은 한국교민만이 아니다.
오히려 주고객은 640만 현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과 일본인들
이다.
그러나 김사장의 야심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멀지않은 장래에 한국식품을 가지고 광동성을 비롯한 중국본토시장을
공략해보겠다는 꿈도 가꾸고 있다.
또 지금은 한국식품만을 취급하고 있지만 앞으로 품목을 늘려 한국산
생활용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대형 마켓을 설립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홍콩경제가 중국으로의 귀속을 앞두고 그 장래에 명암이 엇갈리고 있는
속에서도 이렇게 정력적으로 뛰고 있는 김사장이야말로 세계화시대에
한국인이 지향해야 할 "개척자상"이라는게 주변인들의 평가다.
< 임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