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이 온통 총선열기에 덜먹은 듯한 사이에 북한에 관한 갖가지
소식들이 내외신을 통해 쏟아져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이러다 어깨 너머로 경천동지할 음모가 오가는 것은 아닌가, 으쓱한
대목도 감지된다.

북한정권의 붕괴는 시간과 방법의 문제만 남아 한국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는 유엔군 사령관의 미국 의회 증언에 대답이라도 하듯 지난 29일 북의
김광진 인민무력부 제1부 부장은 휴전 상태가 한계에 온 상황이라고
공언했다.

이 표현이 적어도 실언이나 와전이 아님은 2일 모스크바에서 재확인됐다.

손성필 북한대사는 공식회견을 자청 "불에는 불, 몽둥이에는 몽둥이,
대화는 끝났고 한반도는 전쟁 전야의 팽팽한 정세"라는 말을 서슴없이
덧붙였다.

그에 앞서 강석주 외교부 부장은 김대통령의 재임기간중 한국과의 정치적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KEDO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 보스워스
사무총장에게 말한 것으로 일본 관리가 전했다.

일전불사 식의 이같은 독설은 그러나 언제나 처럼 그와 전혀 다른 움직임을
수반하기 때문에 곧이 곧대로 선전포고로 받아 들이기엔 애매한 측면을
갖는다.

거의 동시에 서너가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미국과 미사일 회담을 베를린에서 곧 열고, 일본과 이달중순 수교회담을
재개하며, 유엔과 미국에는 스스로 철회했던 식량원조를 재요청했고,
함남 신포리에 KEDO원자력의 정지공사를 시작한 사실들이 직간접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거점을 연결한 북한 전략의 골격은 한마디로 한국을 빼돌린 채
대미-일 접근을 본격화하는 구도다.

그러나 이는 결코 북한의 새로운 전략구상이 아니다.

다만 수년간 갈망해 온 이 전략을 북한이 수정-완화한 것이 아니라
실현해내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때 놀라지 않을수 없다.

플루토늄 원자로 건설로 세계를 위협하는데 성공함으로써 40억달러 상당의
경수로 발전소 건설과 중유 공급이란 실리를 따낸 북한임을 상기한다면
휴전파기 위협과 미사일 수출을 바터로 미국에서 어떤 전리품을 새로
얻어낼지 막연하지만 어림은 간다.

여기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한반도문제에 제1 당사국인 한국 어깨너머로 미국 일본은 북한과 어떤
타협도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권리주장 내지 종용으로 언제까지 매달릴수
있나를 생각해야 한다.

저들은 타국의 식량원조마저 훼방한다는 덤터기를 남측에 씌워 동정을
사는 전술로 거의 성공하고 있다.

권좌 승계에 기근문제가 겹친 북의 처지는 설상가상이다.

총선와중에 색깔논쟁도 난처하겠지만 정치가의 안목은 커야 한다.

엉뚱한 동정론도 물론 경계할 일이지만 인색하다는 흠을 남이 공개적으로
잡히면 저들이 파논 함정에 뛰어드는 꼴이 됨을 알아야 한다.

총선 앞으로 1주일, 열 가지가 유리한 상황에서 개인감정 자극하는 전술에
말려들어 일을 그르친다면 분한 일이다.

그런 불상사 없도록 대국적인 한반도 정책을 주도적으로 구상하고 효율적
으로 시행하기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