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의 이동통신 장비시장 개방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이를 위해
한-미 쌍무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해옴에 따라 이동통신 장비시장 개방
문제가 올해 한-미간 첨예한 통상 현안으로 불거질 전망이다.

지난 2일 워싱턴에서 끝난 제4차 한-미 통신협의에서 미국 무역대표부
(USTR)는 기존의 양국간 쟁점사항인 한국통신의 구매제도와 통신장비 형식
승인제도 변경 등은 비교적 성의있게 이행되고 있다고 판단, 협정 불이행국
으로 지정하지 않기로 한 대신 우리측이 예상치 못했던 매우 난처한 요구를
내놓았다.

오는 6월 한국정부가 선정하는 신규 통신사업자들이 구매할 이동통신장비와
관련, 국산장비 우선구매 기술규격제정 등 한국시장 접근을 가로막는 정책을
취하지 말고 외국산 장비도 구매할수 있도록 한국정부가 보장하라는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 정부의 이같은 기습적 제의는 한국의 30여 신규 통신사업자가 오는
2000년까지 구매할 5조484억원 어치의 통신장비 물량에 잔뜩 군침을 흘리고
있는 미국 업체들의 압력에 따른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유선 통신장비 분야에서는 이제 얻을 것을 거의 다 얻었으니 2000년대를
바라보며 새로운 무선통신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도다.

우리는 미국 정부의 이같은 이동통신 장비구매 압력이 국제관행을 무시한
상식밖의 부당한 요구라고 단정하지 않을수 없다.

물론 정부나 투자기관의 조달물자에 대해서는 WTO(세계무역기구)등의
다자기구나 쌍무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논의할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민간 기업이 자유롭게 구매하는 통신장비에 대해 외국산도 구매토록
정부가 보장하라는 것은 애당초 국가간 협상 테이블에서 거론할 문제가
못된다.

미국의 이같은 요구는 한국을 아직도 정부가 민간의 기업활동을 좌지우지
하는 전체주의 국가쯤으로 여기는 멸시적 태도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또 협상의 형식을 쌍무협상으로 하자는 제의도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설령 문제가 있다 해도 그것은 WTO 등의 다자간 협상기구를 통해 논의할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다.

미국이 구태여 한-미 쌍무협상을 고집하는 배경에는 한국이 다자간 협상
에서는 그런대로 협상능력을 발휘하다가도 막상 미국 앞에만 서면 왠지
작아지는 약점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점 우리 정부에도 책임이 없다할수 없다.

이번 워싱턴 협상에서도 우리 정부는 미국의 이통장비시장 개방요구에
대해 "정부끼리 협의할 사항이 아니다"고 거부하면서도 이달 중순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후 재론키로 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정부의 이같은 우유부단한 태도에서 "한국 시장은
힘으로 밀어붙이면 열린다"는 전례가 또 다시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이번에도 미국의 강압에 우리 정부가 물러설 경우 CDMA (부호분할다중접속)
시스템개발등으로 무선통신장비 분야에서 이제 막 국산화의 걸음마를 시작한
국내 통신장비산업이 싹이 트기도 전에 시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정부의 단호한 대응자세와 치밀하고 설득력있는 협상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