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산림을 가꿔온 사람 최무식씨(62).
강원도 삼척군 하장면 토산리 산11번지일대 1백73필지의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임야는 8백29ha로 여의도(8백39.6ha)크기에 거의 맞먹는다.

자유당말기인 지난59년 토산리일대 25ha의 임야를 사면서 조림사업에
뛰어든지 이제 만37년.

군대를 제대한지 갓1년이 지난 26세의 젊디젊던 청년은 이제 육순을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고 그가 심었던 새끼손가락굵기의 어린 묘목들은 벌채를
해도 좋을만큼의 큰 나무로 자랐다.

당시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의 산들은 대부분이 헐벗고 황폐해있었다.

그가 매입한 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이 좋고 나무가 좋아 임업에 일생을 걸었습니다.

나무를 기르는 것이 전망도 괜찮다고 봤지요.

나무가 귀해서 탄광에 갱목을 납품하면 제법 돈이 됐어요.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지만요"

해발7백m로 서울의 도봉산높이는 됨직한 그의 산에 새벽같이 일어나자마자
달려올라가서는 저녁늦게나 돌아오는 고된 나날이었다.

그가 심은 나무수도 이제는 헤아릴 수가 없지만 매년 30ha정도에 12만-
15만본씩 나무를 심었다고 하니 줄잡아 5백만-6백만그루는 심은 셈이다.

그 나무들을 가꾸면서 겪은 사연들이란 이루말할 수가 없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작업단인부들의 노임을 제때에 주지못하던
것이었지요.

이틀이고 사흘이고 인부들이 노임을 받기위해 지켜서 있을때면 피가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노임이나 운임은 현찰로 지급되지만 탄광 등에서 나무값을 받을 때는
석달짜리 어음인데다 그나마 차일피일 미뤄지기 일쑤다.

게다가 어음은 할인하면 2백-3백만원은 보통 깎인다.

부인 홍옥자씨(57)도 남편의 "돈"이 되지 않는 사업때문에 사채를
빌려대느라 곤욕을 치렀다.

탄광이 폐광되고 수입목의 물량이 늘어 국산재의 판로가 막연해지자
사정이 더욱 어려워졌다.

지금은 처음 시작당시보다 무려 30배가 넘는 규모로 산림을 일궈놨지만
어려운건 내내 마찬가지다.

노임 운임 등 경비를 떼고나면 한달에 1백만원 남기기가 빠듯하다.

이처럼 사업성없는 "사업"을 계속 해나가는데에는 산과 나무에 대한
애정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산에 올라가 심어놓은 나무들을 바라보면 흐뭇합니다.

또 산에서 일하는 것이 좋구요.

맑은 공기가 식수를 공급해 국민건강증진에도 일조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전망이 없어도 후회는 안합니다"

그렇지만 사정이 어려워진 동료임업인들이 부도가 나거나 사업을 전환하는
일들이 잦아져 안타깝다.

그는 정부가 임업인들을 지원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입목을 절반으로 줄이고 보험제도를 도입하는 등 임업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정책들이 나와야 합니다.

지금 임업은 벼랑끝에 몰려있어요"

51회 식목일을 맞아 4일 산림청에서 동탑산업훈장을 받는 자리엔 부인
홍씨가 아들과 함께 동석, 기쁨을 같이했다.

모처럼 큰 상을 받아 그간의 고생에 다소간 위로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식들에게는 임업을 가업으로 물리지 않겠다고 털어놨다.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