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3대펌프생산업체인 그런포스의 공장안(5,400여평 규모)으로 들어가면
방진복을 입고 섬세한 손놀림에 여념이 없는 근로자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담배갑 반만한 기판위에 칩을 올려놓고 복잡한 회로를 새기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전자업체의 반도체 공장은 아니다.
이 회사가 내걸고있는 슬로건은 "펌프기술의선도자(Leaders in pump
technology)".
엄청난 기술및 설비투자를 해가며 칩까지 자체생산하는 것이 이 회사가
추구하는 독특한 전략의 하나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아웃소싱"(핵심사업외 나머지분야는 외부에서
조달하는 경영방식)의 거센 흐름을 "역류"하고 있는 셈이다.
전자공장을 나와 펌프 생산공장으로 들어서면 또 한번 특이한 분위기와
마주치게 된다.
펌프를 만들어내는 파란색의 제조설비마다 "그런포스"라는 브랜드가
부착되어 있는 것.
제조설비까지 자체생산한다는 얘기다.
이 회사의 전체 생산설비중 아웃소싱 비율은 불과 25%.총 설비중 75%는
스스로 만들어 쓴다.
자사 펌프제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해내도록 특별히 설계된 설비들이다.
펌프 부품은 두말할 나위없이 거의 100% 자체생산이다.
모든 것을 자체 생산하는 "인소싱"방식은 오히려 코스트상승과 비효율을
불러온다는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그런포스그룹 홍보담당 밥 부르스의 견해는 다르다.
"그런포스도 과거에는 아웃소싱을 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공급업체들의 제품질은 떨어지고 가격은 올라갔다.
그래서 자체생산으로 돌렸다.
한예로 펌프속도 조절기(스피드 설렉트 스위치)의 경우 아웃소싱할때
개당 11크로네였던 가격이 자체생산 이후 3크로네로 떨어졌다"
그런포스 "인소싱" 원칙의 역사는 지난 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펌프생산대수가 연간 10만대를 넘어서자 당시 회장이었던 창업자
폴듀옌슨은 전기모터를 자체 생산키로 결정했다.
"아웃소싱"으로는 철저한 품질관리,기술개발이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정도 생산규모면 모터를 자체생산 해도 수지가 맞아 떨어진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이후 생산대수가 늘어나면서 부품 하나하나에서 설비, 최근에는 첨단
칩까지 자사펌프에 꼭 맞도록 특수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설비나 반도체산업등 펌프이외에 다른 장사에는 "외도"한번 한적
없다.
"그런포스의 목표는 규모면에서 최대기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성공적인 펌프업체, 최우량기업이 되는것"(스벤드 폴스그런포스부회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런포스의 "인소싱"원칙은 소유구조 경영 인사등 회사의 소프트웨어
분야에도 적용된다.
그런포스 본사에서 버스로 약 3분거리에 있는 기술센터.
이곳에서는 약 190명의 견습공들이 기술교육을 받고 있다.
이들은 입사직후 10개월간 이 센터에서 교육을 마친뒤 제 일자리로 배치
된다.
그런포스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공장근로자들은 거의 "무기술"상태이다.
입사직후 하나씩 필요한 훈련을 받아 숙련공으로 성장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설비가 도입되면 그때그때 기술훈련이 따라 붙는다.
덕분에 이 회사 근로자들은 생산라인을 옮겨다니며 순환제 근무를 한다.
"기술자 스카우트"란 이 회사에선 낯선 단어다.
미국제조업계가 앓고 있는 "숙련공 부족난"도 있을리 만무하다.
교육을 통해 인력의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자금 역시 밖에서 끌어다 쓰는 법이 없다.
그런포스는 창업자 폴듀옌슨이 세운 재단소유로 돼 있다.
이 재단은 그런포스 그룹이익의 97~99%를 재투자에 쓰고 있다.
물론 이 회사는 주식시장에 공개돼 있지도 않다.
자체적으로 재정을 조달하고 투자할수있는 건전한 재정풍토만이 성장의
밑거름이라는 이 회사의 철학때문이다.
이런 그런포스에도 단 한가지 "밖"에서 조달하는 것이 있다.
해외 자회사의 "인력"이다.
그런포스는 현재 전세계 32개국에 51개의 자회사를 갖고있다.
본사에서 사장을 파견하는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들과는 달리 그런포스
해외 자회사들은 사장에서 말단직원까지 모두 현지인들로 운영된다.
그나라 소비자의 입맛, 독특한 풍토에 맞추기 위해서는 현지인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에서다.
따라서 모든 지분은 그런포스 본사가 갖되 현지법인의 경영만큼은 현지인
사장이 거의 전권을 쥔다.
그런포스의 특유한 전략은 적중했다.
창업이래 50년 내내 "연속성장"이라는 신화를 이룩했다.
외부의 거센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경영스타일을 구축한
그런포스.
50년전 덴마크 한 시골집 지하실에서 문을 연 펌프가게가 이제는 연간
800만대의 펌프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펌프업체로 성장한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 노혜령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