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설반이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보옥이 말짓기 놀이를 하자고 하는 것은 나에게 벌주를 먹이려고
그러는 거 아냐?"

글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지내는 설반이 그렇게 염려할 만도 하였다.

"무얼 그리 겁을 내세요? 저같은 계집도 한번 해보려고 그러는데요.

설사 벌주를 마신다고 해도 몇잔이나 마시겠어요? 사내대장부가
그까짓것을 가지고"

운아는 은근히 핀잔을 주자 설반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자, 그럼 내가 먼저 할테니 잘 들어보시요"

보옥이 목청을 가다듬어 시를 읊듯이 말짓기 놀이를 하였다.

"여자의 슬픔은 혼기가 지나도록 시집을 못 가는 것이요, 여자의
근심은 낭군님 출세하지 못할까 애태우는 것이요, 여자의 기끔은 아침에
거울앞에서 단장을 할때 자기 얼굴이 어여쁘게 보이는 것이요, 여자의
즐거움은 봄날에 그네 뛸때 엷은 옷자락이 펄럭이는 것이라"

"어, 좋고"

설반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손으로 무릎을 치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합격이라는 표시인 셈이다.

그러나 설반은 고개를 저으며 시비를 걸었다.

"여자의 즐거움 부분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봄에 그네를 뛰면서 옷자락이 펄럭이는 게 뭐가 여자의 즐거움인가
말이야"

"그게 즐겁지 않고 무엇이 즐거워?

그네가 높이 올라가고 겉치마, 속치마가 펄럭이고 속속곳 단속곳 속으로
따뜻한 봄바람이 스며들고.

남자와 그거 할 때 만큼이나 흥분하고 기분이 좋겠는데"

정일홍이 술기운에 벌개진 눈으로 운아의 치마속을 흘끗흘끗 훔쳐보며
보옥을 변명해 주었다.

보옥은 말짓기 놀이하고는 관계없이 비파를 뜯으며 여자의 슬품과
근심을 주제로 한 노래를 한곡 부른 후에 합격의 표시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그 다음 풍자영이 말짓기 놀이를 할 차례가 되었다.

"여자의 슬픔은 남편이 병들어 생명이 위급한 것이요, 여자의 근심은
큰 바람이 불어 집이 무너지려 하는 것이요, 여자의 기쁨은 초산에
쌍둥이를 낳는 것이요, 여자의 즐거움은 꽃밭에 나가 가만히 귀뚜라미를
잡는 것이라"

"뒷다리를 잡으면 끄떡끄떡 하는 귀뚜라미를 무에 쓰려는가.

이 속에 넣으려는가"

설반이 짖궂게 운아의 치마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