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4자회담 제안이 나온 16일 그날로 북한이 거부반응을 내보낸 것은
설마 했지만 너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창구는 전쟁불가피론을 대외에 선언했던 손성필 러시아주재 대사여서
차후 공식성명이 나오기까지는 이를 평양당국 의견으로 간주할 밖엔 없다.

백보를 양보, 4자회담이란 것이 70년대부터 논의돼온 점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며 근린 러시아 일본이 배제된 점에서 완벽하다고 강변할수 없는 측면은
분명 있다.

그럼에도 북의 즉각 거부 표명은 크게 두가지 점에서 무모하다.

더 솔직히 제3국인들에게 똑 같이 코리안으로 불리는 동족으로서 북한의
억지를 볼때마다 답답한 정도가 아니라 부끄럽다.

첫째 북한의 외고집엔 백약이 무효라는 경험이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비록 필요하면 뒤집을수 있도록 외국 주재를 통하는
우회방법은 썼지만, 거부의사를 무리하게 강변한 성급한 처사로 말 안통하는
집단임을 다시 입중한 자충수다.

한심스럽기로는 표현형식 보다 내용에서 더하다.

아무리 버릇이 그렇더라도 고위직, 명색 외교관을 시켜 내뱉는 말들 속의
무사려는 북한권부의 사고능력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손대사의 전번 "짓 이기겠다"는 폭언은 숫제 따져볼 가치조차 없는
망발이라 치자.

그러나 이번 "한반도 새 안보체제 구축을 위해 중재자는 필요없다"든가,
"다른 나라는 이 문제에 관해 아무런 역할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국제회의를 개최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에 이르러선 도대체 그가 구사한
언어가 어느나라 말인지 조차 의심스럽게 한다.

"중재자"란 중국을 가리킨다고 치더라도 필요없다는 "다른 나라"는
문맥상 중국이기 보다 분명 한국을 지칭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에는 전혀 논평조차 미치지 않은 셈이 된다.

손대사 발언의 본의를 보완한 것은 그에 앞서 나온 노동신문의 "한국은
이 문제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사설과 16일 손에 이어 태국서 나온
정확한 설명이다.

이삼노 북한대사는 "정전협상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니만큼 정전협정에
대체할 새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회담은 북-미 2자간에 열려야 한다"고
했다.

사실 하수인 관리들의 말꼬리를 늘어 잡는 자체가 따분하다.

문제는 사고의 이치와 논법까지 뒤틀리게 만드는 저들의 현실이다.

한마디로 지상낙원이라던 북의 기아와 혼돈, 미제에 빌붙어 먹는
거지-괴뢰라 외쳐온 남의 변모등 나무 분명한 도치를 넉살좋은 저들로서도
더 호도할 요설은 없다.

만천하 공개된 현실을 인정하기는 커녕 정반대로 미화하려니 남은 수단은
억지 욕설 공갈 협박 뿐이다.

그 원인이 설령 휴전자체를 결사 반대한 이승만정권의 고집이었어도
한국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한국동란의 당사국이 아니라고 바짝바짝 우긴들
누가 부인하는가.

아무리 6.25가 북침이라고 40년 우겨온 저들이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그런 외고집을 또 부려도 되는가.

머리만 처박고 몸을 숨겼다고 믿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꿩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