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폭설로 길이 막혀 두문불출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개울
건너 밭 이랑엔 어느덧 보리가 푸릇푸릇하다.

먼 산에 잔설을 이고서도 봄은 이렇게 와 있다.

이처럼 단순한 자연의 순환법칙에 마음을 기울이노라면 늘 분주한
도시의 일상이 우리의 심성을 얼마나 메마르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이름없이 피고 지는 소박한 들꽃이나 나지막이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친숙하게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날로 더해가는 것은 사는 일에 골몰했던
영혼이 지쳐 있다는 징후이자 어느새 인생을 되돌아볼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할 터이다.

찬란하리라 믿었던 젊은날의 환상들을 깨뜨리면서 반생을 훌쩍
넘기고 나니 문득 쓸모없는 짐만 잔뜩 싣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싶다.

부질없는 욕심과 오만을 버리리라,지성으로 무장된 위선과 허영심도
버리리라, 용서와 화해를 모르던 옹색한 자존심도 버리리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삐걱이는 수레를 멈추지 못하던 어리석음으로부터
이젠 정말 벗어나고 싶다.

빈 차로 떠나는 마지막 서울행 버스가 어둠속 산마루를 조심스레
내려간다.

저 구비진 바람부는 신작로.어쩌면 그 길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고단한
인생사의 노정인 듯싶다.

삐걱이는 삶의 수레를 세워놓고 잠시 쉬었다 가면 어떨까.

안간힘을 쓰며 지켜오던 모든 짐들을 버릴 수만 있다면 다 버리고
덜컹거리는 빈 수레로 인생의 마지막 언덕을 천천히 음미하며 내려갔으면
한다.

얼마전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계신 화가 한분의 문병을 갔다.

왕성한 의욕으로 늘 건강하리라던 그분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채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 맞이하게 될 삶의 끝자락을 보는 듯
아득해지던 허무감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원숙한 정신의 소유자인 노화가는 담담하고 고요한 얼굴로
상심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일생동안 요즘처럼 홀가분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산 적이 없다.

우스운 것은 내 육신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고서야 비로소
그 많은 책임과 의무로부터 놓여났다는 것이다.

훌륭한 가장으로 도덕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늘 좋은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돼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

그 모두가 내게는 부채였고 멍에였다.

아쉬운 것은 건강과 시간이 허락할 때 그 모든 것이 스스로 선택한
욕망의 굴레였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험과 도전으로 드라마틱한 한 평생을 후회없이 살았으리라 여겨지던
어른이었음에도 병상에 누워 뒤돌아본 지난날은 고통스럽고 외로운
행로였다는 것이다.

결국 한 발짝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이해관계에 얽혀 다투고 시기하고
누군가를 비방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에 다름 아니다.

돌이켜보면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야 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정치현실 또한 가슴 아프다.

나아가 냉혹함과 비정함 속에서 막바지엔 서로 상대후보와 정당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치러진 이번 선거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 풍토속에서 과연 누가 겸양의 덕과 도덕성을 갖춘 선량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로 소신없는 한표를 던진 일 또한 돌이켜보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

창밖에는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알고 때가 오면 다시 싹을 피우는
나무들이 순진한 자세로 봄을 맞고 있다.

우리의 삶도 저 소박한 자연의 심성을 닮아가기를 꿈꿔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