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나라에서 가져온 귤나무를 심었더니 탱자가 열리더라고 했다.

필자가 근래 우리 사회 여러 현상을 보면서 떠올린 속담이다.

풍토와 환경이 같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한데도 우리는 좋은 귤나무를 옮겨 심으면 절로 좋은 귤이 열릴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어 왔다.

수없이 잘못을 되풀이 하면서.

여러번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

우리 풍토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

형편이 자꾸만 나빠지고, 마침내 떫은 탱자를 놓고 감귤처럼 달다고
우겨대기도 하고, 탱자 대신 슬그머니 밀수입된 귤을 즐기기도 한다.

한국엔 요즘 "신민족주의"가 팽배하다고 한다.

다른 민족에 대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이 되레 심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나 미국에 대한 감정대응이 두드러진듯이 보인다.

그러면서 일본과 미국의 대중문화가 도시 농촌 할것 없이 범람하고 있다.

그런 풍속만 보면 대단히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사회라는 느낌을 준다.

한편에선 탱자를 신주모시듯 하면서 "우리 것이 최고다" 이렇게 외쳐대기도
한다.

귤과 탱자의 중간쯤 되는 시큼달콤한 것으로 우선은 만족하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노력은 별로 하지 않고, 겉으로는 탱자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감귤을
먹고 있다.

대통령제냐 내각책임제냐의 논쟁도 그렇다.

어휘가 주는 관념의 싸움만 같다.

대통령제도 여러가지가 있고, 내각제 역시 그럴 것이다.

선거가 끝나자 통합선거법 위반을 잡는다고 어수선하다.

평균 8,000만원이 법정 경비라고 했다.

모르긴 해도 이 제한을 곧이곧대로 지킨 사람은 드물 것이다(신문도 그렇게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또다시 "운수 사나운 놈"만 법에 걸리게 될 뿐이다.

이상을 좇다, 혹은 모방을 하다 내 건강만 망가져버린 형국이 된 것이다.

아무도 한국의 땅과 기후 그리고 사람에게 어울리는, 혹은 수용될만한
해법을 궁리하지 않는다.

식자들도 "매스 미디어"도 매한가지.

미국의 선거는 어떻고, 영국의 의회운영은 어떻고, 민주주의 본질(이것도
대개 남들이 하는 말을 빌리지만)이 어떻고, 유식하게 설교를 하는데 참고가
되긴 하겠으나 열등감을 심어주는 데도 한몫을 할것이다.

한국은 한국에 맞는 제도의 창출과 지혜로운 운영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면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냐고 대뜸 이편을 "반민주"로
내몬다.

그런 "도그마"가 아예 몸에 배어 있어 거의 구제불능이라는 것이 필자의
느낌이다.

우리 학자들이 자본주의론을 하면서 즐겨 인용하는 것이 있다.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이다.

글쎄, 지금의 자본주의가, 국경없는 자본주의가 과연 그런 윤리를 지키거나
유지하고 있는지 잘 알수 없는 일이고 유교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과연
수용될만 한 것인지, 다른 덕목과 윤리가 더 맞는건 아닌지 역시 잘 알수
없는 일이다.

주제넘는 얘기같지만 필자는 외국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무슨무슨식 경영
이론인가 하는 것도 무작정 적용한다면 글쎄 우리의 실정에 맞을까, 억지로
적용해서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이 없을까, 남의 일이지만 은근히 걱정이 될
때가 있다.

조직을 바꾼다고 금방 달라지지 않는 것이 이른바 "생태계"의 생명력이다.

억지로 틀을 뜯어고치면 이중구조가 생겨난다.

또 위선을 부추긴다.

인간세상에 위선이 전혀 없을수는 없지만 이게 너무 심해지면 몸채로
망조가 드는 것이다.

이런게 극한까지 이른 사회가 북한일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혹은 국민을 위해서, 정치를 한다, 기업을
한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말이 거짓은 아닐지 모르지만 정직한 것은 아닐 터이다.

개인적인 욕심이 전혀 없는(어떤 형태건) 동기나 헌신은 가짜 아니면 풍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