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밭 속의 여자는 빗소리 때문에 보옥의 고함을 어느 시녀의 목소리
정도로 여기고 대꾸를 하였다.

"나를 생각해주니 고마워요.

하지만 언니도 비에 젖을 테니 얼른 들어가세요"

보옥은 피씩 웃음을 웃다 말고 자기 옷을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자기 옷도 완전히 젖어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물초가 되다가는 어느 장사라도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저 여자가 나는 언니라고 불렀는데 내가 남자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무안하겠는가.

저 여자가 내 얼굴을 자세히 보기 전에 얼른 자리를 뜨자.

보옥은 그 여자와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빗줄기를 뚫고 이홍원으로 달음질쳤다.

마침 이홍원에서는 열두 여배우들 중에 속해 있는 보관과 옥관이 놀러와
습인과 함께 있다가 그만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들은 정원에서 놀 수 없게 되자 처마 밑으로 와서 배수용 도랑을
막고는 거기다가 원앙과 오리들을 띄워놓고 도랑을 가지 못하도록 이리
몰고 저리 몰고 하며 깔깔거렸다.

그렇게 웃음보를 터뜨리는데다 빗소리까지 요란하니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금방 들릴 리 없었다.

화가 난 보옥이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리다가 발길질까지 하였으나 그래도
대문을 열어주려고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보옥은 머리부터 시작하여 온몸이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고
말았다.

"이년들을 그냥"

보옥이 이를 갈 무렵, 그제야 습인이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누가 온것일까.

보옥 도련님이 이런 비 속에 돌아올 리가 없고 다른 아가씨들도 아닐 테고,
급히 심부름을 온 시녀인가.

다른 처소에서 시녀가 심부름을 왔다면 이쪽도 귀찮아질 게 뻔하였다.

습인은 사월이더러 누군지 살펴보고 대문을 열어주라고 하려다가 자기가
직접 대문께로 와서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심부름 온 시녀라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옥 도련님이 비에 흠뻑 젖어 두 눈에 불을 켜고 있지 않은가.

습인이 깜짝 놀라 빗장을 벗기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대문이 열림과 동시에 보옥이 누가 문을 열어 주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오른발을 힘껏 뻗어 습인의 옆구리를 냅다 갈겼다.

"아이쿠"

습인이 외마디 신음을 토하며 빗물이 흥건히 고인 땅바닥에 쓰러졌다.

보옥이 또 한번 발로 밟고 나서야 쓰러져 있는 시녀가 습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