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습인이잖아"

보옥이 순간적으로 실수했구나 싶어 습인을 일으켜 주며 사과를 하였다.

"난 습인인 줄 모르고 말이야. 딴 시녀가 나를 놀리느라 대문을 늦게
열어주는줄 알았지.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습인은 허리의 통증으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꾹 참으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도련님이 화를 내실 만도 하죠.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대문을 빨리
열어주지 않으니. 우린 빗소리 때문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하긴 했지만"

"난 사월이나 벽흔이들인 줄 알고"

보옥이 거듭 습인에게 미안해 하였다.

"얼른 들어가서 젖은 옷을 갈아입으세요.

감기들기 전에"

"습인이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둘이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어느새 비가 멎고 그 틈을 타
보관과 옥관이 도망을 치듯이 이홍원을 빠져나갔다.

저녁이 되어 습인이 보옥의 침대 자리를 봐주고는 욕탕으로 들어가
옷을 완전히 벗고 다시 한번 몸 전체를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보옥의 발길질로 채인 자리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옆구리뿐만 아니라 겨드랑이도 멍이 들어있고 등과 팔뚝 근방에도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숨을 쉬려고 하거나 몸을 움직일 적마다 통증이 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졌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렇게 모질게 발길질을 했을까.

습인은 보옥을 원망한다기 보다 자기 신세가 서러워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습인이 자기 침대로 와 누웠으나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새벽녘에 잠이 깜빡 들었는데 꿈속에서도 비가
쏟아지고 그 빗줄기 하나 하나가 가는 대나무로 변하더니 습인의 몸을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앗"

습인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더니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입에서 가래 뭉치 같은 것을 토해
내었다.

보옥도 습인의 비명소리에 깨어나 등불을 들고 습인의 침대로 다가왔다.

"왜 그래? 악몽을 꿨어? 내가 발길질을 잘못하여 악몽까지 꾸게 하고"

보옥이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습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았다.

열이 펄펄 나고 있었다.

"도련님, 방금 내가 입에서 뭘 토해내었는데 그게 뭔가 등불로 한번
비춰봐주세요"

보옥이 습인의 부탁대로 방바닥을 등불로 비춰보니 시뻘건 핏덩어리가
아닌가.

보옥과 습인은 둘 다 기겁을 하여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