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자회담 제의의 제주 선언이 나온지 오늘로 1주일이 되도록 가타부타
북측의 딱 부러진 반응이 없자 일부에선 조급성을 보이는 듯도 하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그리 성급히 보챌 일도 아닐뿐 더러 종내 그 방향
으로 일이 풀려 나갈수 밖엔 다른 대안이 없다는 판단이 간다.

선언 당일 외국 주재 대사들의 거부논평에 불구, 이틀뒤 나온 "4자회담
현실성을 검토중"이라는 평양의 반응은 중간논평 자체가 전에 없던 일이라며
외부 세계에 좋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논자에 따라 제가끔인 북한에 대한 다기한 분석은 본원적으로 북한의
내부 자체가 유동적인데 기인함을 유의해야 한다.

마치 여러 맹인의 손에 만져진 코끼리의 각기 다른 신체 부위처럼 외부인
에게 목격-청취되는 북한의 실상은 각 측면마다 상이, 평가가 같을순 없다.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이나 퍼레이드 장면에선 강한 권력장악과 대남
경계강화란 강성 평가가, 경제기술 관료들의 개방-성장 열망을 보아선
연성 평가가 나오는 식이다.

심지어 식량난 정도에서도 외부인이 어느 부분을 보고 왔느냐에 따라
마냥 희비가 엇갈린다.

4자회담에 관해서도 백령도 근해의 북한 군함 월경에 시각을 고정하면
회담개최 전망이 흐리고, 반대로 요즘들어 부쩍 활발해진 북한의 대외
접촉에 의미를 부여하면 전망이 밝아 보인다.

북한군 함정의 1시간반 월경 뉴스를 접하며 서해5도 도발로 휴전파기
책동우려가 높다는 경고를 상기하면 급박하나, 협정상 해상에 획정된 선은
없어서 무의식적 항로이탈 가능성이란 국방부 해석에 유의하면 별일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대외 접촉, 특히 직간접의 대미 접촉은 대화의 가능성이
높다할 만큼 급작스레 빈번해진다.

베를린 미사일 회담, 금주 예정의 미군 유해 송환회담등 정부간 접촉말고도
지난주말 버클리대 통일 토론회, 22일 조지 워싱턴대의 한반도 경협 세미나,
28일 애틀랜타의 한반도문제 세미나 등 북한인의 참가가 뻔질나다.

오히려 이같은 급변은 북한의 한국을 뺀 대미 접근 전술에 연결된 노출부분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자아낸다.

그렇잖아도 재선을 앞둔 클린턴 진영이 국지분쟁 평정책 일환의 대북
접근에서 한국의 소외 우려를 4자회담으로 무마하면서 제재완화나 평화협정
등 핵심 현안은 이면에서 북과 직접 타결, 먼 안목서 북을 포용하려 들지
모른다는 의구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첨단 정보시대에 2중 전술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공개된 논리로 관계국이 납득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타결하는 것이
순리다.

북한의 장래에 관해서도 흑백논리 이외에 좀더 넓은 가능성이 제기된다.

붕괴하되 부작용 적은 연착륙과 전쟁이나 일방흡수 등 요란스런 소리의
경착륙 두가지뿐 아니라 개방 등을 통한 희생(무착륙)도 상정될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국은 물론 당사자인 남북의 정부나 국민은 국가-정권적 차원이상
수백만-수천만의 우리들 인명이 달린 문제를 하루가 급하게 서둘러선 일을
그르치기 쉽다.

4자회담도 좀 느긋이 기다려 보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