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흔이가 목욕 시중들었던 일이라면 보옥이 잊어먹을 리 없다.

벽흔은 보옥의 등을 밀어주는 일 같은 것만 하려고 하고 보옥은 아예
벽흔도 옷을 벗고 물통으로 들어오도록 재촉하고 그런 와중에 방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벽흔이 옷을 반쯤 벗고 물통으로 들어가 보옥의 몸을 씻어
주었는데 목욕이 끝나고 또 한 차례 둘 사이에 실랑이가 있어 침대 요가
푹 젖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청문이 그때 일을 들먹이는 속셈은 무엇인가.

자기는 벽흔이 꼴이 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벽흔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알겠어. 목욕 시중을 들어주지 않겠다
이거지?"

"도련님이 언제 목욕 시중들어달라고 그랬나요? 같이 목욕을 하자고
그러셨잖아요"

"그 말이 그 말이지"

보옥이 슬쩍 비켜나갔다.

청문이 보옥에게서 한 걸음 정도 몸을 떼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도련님, 오늘 저녁은 선선한 편이니까 아까 목욕을 했으면 저녁에는
세수나 하시고 주무세요.

머리나 감으시든지"

"음... 청문이도 목욕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나도 하지 않을께.

우리 둘 다 목욕은 하지 말고 과일이나 먹을까"

"그래요. 나도 목욕을 하지 않을게요.

그렇지 않아도 원앙 언니가 수박을 가지고 온 게 있어서 수정 항아리에
물을 채워 담가두었는데"

"그것 참 시원하겠구나.

그 수박 가지고 와"

"근데 도련님이 아침에 저에게 한 욕 말이에요.

굼벵이 같다고 한 말이 하루 종일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정말 제가 굼벵이 같아요?

이번에도 수정 항아리를 들고 오다가 아침에 부채살을 부러뜨렀듯이
항아리를 깨어 먹으면 어떡하죠?"

"깨어 먹으면 깨어먹는 거지 뭐.

항아리는 깨어지라고 있는 거고, 부채살은 부러지라고 있는 거고"

보옥은 술기운을 빌어 호탕하게 말하고 있었다.

청문은 그 말에 보옥에 대해 가졌던 서운한 마음이 다 풀려 다시
천방지축으로 놀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부채살은 부러지라고 있는 거라고.

그럼저 부채 나한테 줘봐요"

보옥이 침대 모서리에 놓아둔 부채를 청문이 손으로 가리켰다.

보옥이 그 부채를 집어 주자 청문은 부채를 쫙쫙 찢고 부채살을
부러뜨렸다.

"허허, 찢어지고 부러지는 소리 듣기 좋다"

보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청문을 부추기고 청문은 신이 나서 부채를
더욱 갈기갈기 찢으며 깔깔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