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에 올라 롱퍼팅을 넣는 순간, 퍼터를 멋있게 휘두른 다은 칼을
차듯 옆구리에 쑤여넣는 중절모 쓴 필드의 신사, 갤러리 뿐만아니라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그의 이런 동작에서
많은 여유를 가지며 웃지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어느때부터인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투우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도 이제는 환갑이 넘어서 어쩔 수 없이 젊은 사람들에게 밀리는
바람에 소위 톱플레이어의 대열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따라서 톱플레이어를
중심으로 방영하는 텔레비전도 부지불식간에 그를 등한시 하게되어
시청자들은 그의 화려한 우스개 동작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잊혀가는 우리들의 영웅,그의 이름은 치치 로드리게스!

그는 푸에리토리코 출신이다.

록펠러의 아들인 로렌스가 도라도비치에 골프코스를 만드는 바람에
골프와 인연을 맺게되었다.

물론 그곳에서 캐디생활을 시작으로 골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볼이나 골프클럽을 살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사용한 첫번째 골프클럽은 동네에서 구하기 쉬운 구아마
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볼은 깡통을 일그려 뜨린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어려서 돼지오줌통에 짚을 쑤셔넣어 축구공으로 가지고
놀던 것처럼 로드미게스는 높은 티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통 골퍼들이 1인치 정도의 높이로 볼을 티업하는데 비하여 그는
그 두배이상으로 티업을 한다.

그 까닭에 관하여 그가 골프를 시작할 무렵 이처럼 깡통을 치고 놀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이 있다.

로드리게스의 부모들은 이혼을 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로드리게스의
곁을 떠나 뉴욕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가 맨처음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뉴욕을 방문했을때 그녀의
아파트와 이웃사람들의 처참함에 너무도 놀라, 그는 어머니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드리고자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1963년 덴버 오픈에서 우승했을때 그는 상금으로 고향인
산주안의 집근처에 새로 집을 한채 사서는 자기 어머니를 그곳으로
이사하게 하였단다.

그런 일이 있은뒤부터 그는 프로골퍼들 가운데 최고의 자선가로
변신했다.

특히 그는 지체부자유 장애아에 대한 자선가로서 유명하다.

그래서 미국 골프협회에서는 1989년 그에게 보비죤수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어느날 그는 이런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들려주었다.

"우리는 너무도 가난하여 제가 어렸을때 받았던 가장 큰 선물은
구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부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아버지는 저의 영웅이었습니다.

저는 어느날 저의 아버지가 저의 집 앞마당에 있는 바나나나무에서
바나나를 훔쳐가는 이웃집에 사는 한 녀석을 붙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저에게 바나나를 수확하는데 쓰는 큰 칼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바로 그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무에 올라가 바나나 몇송이를 잘라서는 그것들을
모두 그 녀석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정말로 위대한 가르침이었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