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 (순조 33년) 서울에서는 "쌀폭동"이 일어났다.

그해 춘궁기인 3월, 쌀값이 갑자기 치솟자 서민들이 들고 일어나 장안의
모든 싸전에 불을 지르고 한강변으로 몰려가서 쌀을 매점해 쌓아둔 집
15채를 태워버렸다.

그해는 풍년이 들어 예년보다 많은 쌀이 반입돼 쌀값은 오히려 전보다
떨어졌다.

매점해 둔 쌀값이 오르지 않을 것을 염려한 경강의 도매상들은 여각
객주들에게 쌀을 쌓아두게 했다.

그러자 2월하순부터 장안에 쌀이 귀해지면서 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3월 초순에는 쌀값이 3배로 뛰면서 장안의 싸전이 모두 문을 닫아버리자
돈을 주고도 쌀을 살 수 없게된 가난한 소비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순조는 포도청의 포졸까지 풀어 가까스로 폭동을 진압한 뒤 매점매석한
경강상인 1명, 싸전상인 1명, 폭동주모자 7명 등 모두 9명을 사형에
처하고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그 무렵의 여러가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도매상의 매점매석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상술의 하나였던것 같다.

서울 도매상들은 지방의 생산품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한강변과
송파, 그리고 도봉산록의 루원등 서울 외곽에 있던 난전의 상권을 쥐고
흔들었다.

이들 서울 도매상들의 상업 본거지는 남대문 밖의 칠패와 동대문 밖의
이현이었다.

특히 남대문 밖의 칠패는 건어물 도매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곳의 도매상들은 송파 루원등의 난전에서 건어물을 매점했다가 시기를
보아 값을 올린 뒤 시중에 넘겨서 큰 이익을 얻어 부상으로 커갔다.

매점매석이 뛰어난 상술의 하나로 여겨지던 왕조시대의 전근대적 상업
얘기다.

판매를 위탁받은 멸치를 냉동창고에 쌓아두고 멸치값을 조작해 억대의
수수료를 챙긴 건어물 중도매인들이 최근 검찰에 구속됐다.

이렇게 불법유통시킨 멸치가 20만여포나 된다니 한때 멸치값이 같은
무게의 소고기값의 2배나 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것 같다.

그래도 160여년 전에 일어난 "쌀폭동"흡사한 소비자의 반매점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수입된 말레이시아산 멸치 덕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18세기 중엽부터 매점매석으로 송파장터의 상권을 휘어잡았던
서울 도매상의 상술이 가락농수산물시장에서 되살아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윤보다 정직과 신용을 앞세우는 상인정신이 어느때 보다 필요한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