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6) 박재덕 <패시픽 프레미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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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남단 태평양 연안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밴쿠버.
캐나다 제3의 도시이면서도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지명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한국인"의 억척스런 삶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명용품 전문 무역업체인 패시픽 프레미어사의 박재덕 사장(57)이
그 주인공이다.
박사장이 갖은 고생끝에 이민생활 7년만인 지난 81년 설립한 패시픽
프레미어사는 연간 350만달러의 외형을 올리는 중견업체로 성장했다.
때문에 박사장은 현지 교민사회에서 대표적인 성공기업인으로 대접받고
있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60년)후 한국외환은행에 다니던 박사장이
캐나다 이민을 결심한 것은 지난 74년.
중견은행원으로서의 안락한 삶보다는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 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고 결국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비내리는 늦가을 밴쿠버에 도착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학력과 경력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처음으로 얻은 직장은 시립운동장 수납원.
월 400달러의 저임금이었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박사장은 주말이면 공장의 보초를 서거나 고국에서
수입해온 장신구를 팔기도 했다.
고국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했던 아내도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봉제공장 미싱사로 나서야했다.
하지만 생활은 좀처럼 나아질줄 몰랐고 말 그대로 신산한 삶이 이어졌다.
이것 저것 해보다 새롭게 결심한 사업이 수입식품점.
그가 전혀 경험이 없는 식품업에 손을 댄 것은 단지 생계유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이민생활에 외로움이 쌓여 "내나라 말이라도 실컷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 식품점"이라는 이름의 한국식품 수입판매점을 열었다.
그는 이 식품점에서 한국으로부터의 직수입품뿐 아니라 가래떡과 김치 등
고유음식도 만들어 팔았다.
아이들은 보모에게 맡기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떡을 빼고 김치를 담아
팔았다.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다음날 팔 떡과 김치를 준비하려니 항상
잠이 모자랐다.
이바람에 박사장의 부인은 졸음결에 떡을 썰다 손을 베는 일이 허다했고
지금도 박사장은 부인의 거칠어진 손을 볼때마다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이런 생활을 하는 동안 그에게는 어느새 "수이초이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민오기전 서울에서는 친구들 사이에 멋쟁이로 불리던 그가 닳고 단
청바지를 입고 배추를 사기 위해 차이나타운에 하도 자주 드나들자 중국인
상인들이 중국어로 배추를 뜻하는 수이초이로 부른 것이다.
이 상점을 시작하면서 그는 아내와 "5년이 될 때까지는 하루도 쉬지 말자"
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은 지켜졌다.
5년만에 처음으로 가족들과 야유회를 가게 됐는데 흥분한 그의 아내가
밥을 빠뜨리고 와서 부득이 인근 상점에서 양쌀을 사서 먹은 경험도 있다.
이런 정성이 차츰 인근에 알려지기 시작, 한국교포는 물론 나중에는
필리핀과 일본인들도 서울 식품점의 단골이 됐다.
식품점을 차린지 10년만에 그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점인 "데어리 퀸"을
빌딩과 함께 사서 다음 단계의 사업기반을 다지게 된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데어리 퀸"은 종일 손님이 그치지 않는 햄버거의
명소였다.
이와함께 그는 식품점을 팔기 3년 전부터 이미 그의 전공을 살려 무역업
에도 손대고 있었다.
함께 이민온 친구와 동업으로 사무실을 차려 무역회사 간판을 내걸고
전구 수입업무를 개시한 것.
하지만 무역업이란 게 생각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필립스나 제너럴 일렉트릭 같은 세계적인 전구회사들과 경쟁하려니 값은
싸야하고 품질은 비슷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
또 수입해온 전구는 운반도중 깨진 것이 대부분이고 질도 샘플이나
선전보다 턱없이 떨어져 신용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회사를 차린지 1년만에 토론토의 큰 거래선이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바람에 그의 회사도 자본금을 반이상 까먹는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은 바로 대학동기인 죽마고우의 배신이었다.
한국의 전구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중간 수수료를 챙기던 이 친구가
불량품을 모아 보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스 도안비를 따로 보냈는데도 그 친구는 전구를 담는
포장박스를 미국에서 제일 큰 전구 수입회사인 ABCO사의 사진과 이름을
도용해 보내왔다.
그것도 모르고 각처에 물건을 판 그는 ABCO사로부터 고소까지 당하게 됐다.
이 사건으로 그는 4만달러의 손해 배상과 변호사비 1만달러 등 5만달러의
금전적 손실과 함께 물건이 반품되고 신용이 실추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친구에게 배신당한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그는 여러 곳으로 거래처를
뚫은 결과 스웨덴에 본사를 둔 IKEA사로부터 연간 60만달러어치의 전구를
수주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냉전 종식과 더불어 동구권과의 교역이 늘어나자 IKEA사가
헝가리의 공장과 납품계약을 맺었다며 6개월후에 거래를 끊겠다고 일방적
으로 통고해왔다.
사정사정끝에 계약을 6개월 연장했지만 결국 1년만에 계약은 끊어지고
회사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마지막 출구를 찾기 위해 부사장과 함께 미국 시장으로
판로개척을 위해 길을 떠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의 눈엔 "ENERGY SAVE LIGHTING FIXTURE"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주인으로부터 그것이 절전형전구라는 소리를 듣자 회사를 소생시킬 빛을
보는 듯 했다.
그는 그 회사직원으로부터 절전형전구를 만드는 기술을 배워 공장을
차렸다.
이 상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 이전의 타격을 만회했을 뿐 아니라
회사의 앞날을 밝혀주는 등대역할을 했다.
이 제품의 성공이 발판이 돼 박사장의 패시픽 프레미어사는 이제 연간
350만달러의 외형에 북미지역 8개 영업망을 거느린 중견 무역업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아직도 박사장에게 캐나다에서의 무역업은 결코 쉽지 않다.
"세계굴지의 회사들과 경쟁해야하며 매상이 늘면 그만한 양의 재고와
외상이 쌓인다"고 그는 말한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인종장벽이다.
유색인종에 대해 은근히 우월감을 갖고 있는 캐나다인을 고용하고
캐나다인을 상대로 장사하자니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쉽게 돈을 벌려고 했으면 이미 무역업에서 손을 뗐을 것이라고 한다.
식품점이나 햄버거가게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하는데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2세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이 그를 지탱시켰다.
늘 궂은 일부터 앞장선다는 박사장은 세가지의 사업신조를 갖고 있다.
첫번째 사업신조는 지식.
"아는 것이 힘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도 이론적인 면에서 캐나다 직원들이나 바이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매일 이 곳에서 발행되는 일간지와 경제지를 읽으며
쉬지 않고 공부하고 있다.
그는 또 하나의 사업성공조건으로 근면성을 꼽는다.
윗사람이 어려운 일에 솔선수범하면 부하직원들은 자연히 상사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박사장의 세번째 사업신조는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기고 그들의 복지후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의 회사직원들은 한국식으로 퇴근후나 주말에도 일하는 때가 많다.
처음에는 이런 근무여건에 대해 현지채용인들의 불만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박사장이 그들을 한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니 차차 한국식
경영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또 사장 스스로 물건을 나르고 힘든일에 솔선수범을 보이니까 그들도
이에 감동해 회사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더라는 것이다.
한국교포들은 누구나 그의 회사에 가면 창고에 쌓인 물건을 보고 놀라고
그가 한국식으로 직원들을 부리는 것을 보고 놀란다.
대부분의 이민 1세들이 동네구멍가게나 소매상으로 현지조달품을 취급하는
현실에서 그는 한국물건을 파는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우뚝 서 있다.
< 손상우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3일자).
캐나다 제3의 도시이면서도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지명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한국인"의 억척스런 삶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명용품 전문 무역업체인 패시픽 프레미어사의 박재덕 사장(57)이
그 주인공이다.
박사장이 갖은 고생끝에 이민생활 7년만인 지난 81년 설립한 패시픽
프레미어사는 연간 350만달러의 외형을 올리는 중견업체로 성장했다.
때문에 박사장은 현지 교민사회에서 대표적인 성공기업인으로 대접받고
있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60년)후 한국외환은행에 다니던 박사장이
캐나다 이민을 결심한 것은 지난 74년.
중견은행원으로서의 안락한 삶보다는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 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고 결국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비내리는 늦가을 밴쿠버에 도착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학력과 경력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처음으로 얻은 직장은 시립운동장 수납원.
월 400달러의 저임금이었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박사장은 주말이면 공장의 보초를 서거나 고국에서
수입해온 장신구를 팔기도 했다.
고국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했던 아내도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봉제공장 미싱사로 나서야했다.
하지만 생활은 좀처럼 나아질줄 몰랐고 말 그대로 신산한 삶이 이어졌다.
이것 저것 해보다 새롭게 결심한 사업이 수입식품점.
그가 전혀 경험이 없는 식품업에 손을 댄 것은 단지 생계유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이민생활에 외로움이 쌓여 "내나라 말이라도 실컷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 식품점"이라는 이름의 한국식품 수입판매점을 열었다.
그는 이 식품점에서 한국으로부터의 직수입품뿐 아니라 가래떡과 김치 등
고유음식도 만들어 팔았다.
아이들은 보모에게 맡기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떡을 빼고 김치를 담아
팔았다.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다음날 팔 떡과 김치를 준비하려니 항상
잠이 모자랐다.
이바람에 박사장의 부인은 졸음결에 떡을 썰다 손을 베는 일이 허다했고
지금도 박사장은 부인의 거칠어진 손을 볼때마다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이런 생활을 하는 동안 그에게는 어느새 "수이초이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민오기전 서울에서는 친구들 사이에 멋쟁이로 불리던 그가 닳고 단
청바지를 입고 배추를 사기 위해 차이나타운에 하도 자주 드나들자 중국인
상인들이 중국어로 배추를 뜻하는 수이초이로 부른 것이다.
이 상점을 시작하면서 그는 아내와 "5년이 될 때까지는 하루도 쉬지 말자"
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은 지켜졌다.
5년만에 처음으로 가족들과 야유회를 가게 됐는데 흥분한 그의 아내가
밥을 빠뜨리고 와서 부득이 인근 상점에서 양쌀을 사서 먹은 경험도 있다.
이런 정성이 차츰 인근에 알려지기 시작, 한국교포는 물론 나중에는
필리핀과 일본인들도 서울 식품점의 단골이 됐다.
식품점을 차린지 10년만에 그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점인 "데어리 퀸"을
빌딩과 함께 사서 다음 단계의 사업기반을 다지게 된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데어리 퀸"은 종일 손님이 그치지 않는 햄버거의
명소였다.
이와함께 그는 식품점을 팔기 3년 전부터 이미 그의 전공을 살려 무역업
에도 손대고 있었다.
함께 이민온 친구와 동업으로 사무실을 차려 무역회사 간판을 내걸고
전구 수입업무를 개시한 것.
하지만 무역업이란 게 생각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필립스나 제너럴 일렉트릭 같은 세계적인 전구회사들과 경쟁하려니 값은
싸야하고 품질은 비슷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
또 수입해온 전구는 운반도중 깨진 것이 대부분이고 질도 샘플이나
선전보다 턱없이 떨어져 신용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회사를 차린지 1년만에 토론토의 큰 거래선이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바람에 그의 회사도 자본금을 반이상 까먹는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은 바로 대학동기인 죽마고우의 배신이었다.
한국의 전구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중간 수수료를 챙기던 이 친구가
불량품을 모아 보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스 도안비를 따로 보냈는데도 그 친구는 전구를 담는
포장박스를 미국에서 제일 큰 전구 수입회사인 ABCO사의 사진과 이름을
도용해 보내왔다.
그것도 모르고 각처에 물건을 판 그는 ABCO사로부터 고소까지 당하게 됐다.
이 사건으로 그는 4만달러의 손해 배상과 변호사비 1만달러 등 5만달러의
금전적 손실과 함께 물건이 반품되고 신용이 실추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친구에게 배신당한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그는 여러 곳으로 거래처를
뚫은 결과 스웨덴에 본사를 둔 IKEA사로부터 연간 60만달러어치의 전구를
수주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냉전 종식과 더불어 동구권과의 교역이 늘어나자 IKEA사가
헝가리의 공장과 납품계약을 맺었다며 6개월후에 거래를 끊겠다고 일방적
으로 통고해왔다.
사정사정끝에 계약을 6개월 연장했지만 결국 1년만에 계약은 끊어지고
회사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마지막 출구를 찾기 위해 부사장과 함께 미국 시장으로
판로개척을 위해 길을 떠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의 눈엔 "ENERGY SAVE LIGHTING FIXTURE"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주인으로부터 그것이 절전형전구라는 소리를 듣자 회사를 소생시킬 빛을
보는 듯 했다.
그는 그 회사직원으로부터 절전형전구를 만드는 기술을 배워 공장을
차렸다.
이 상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 이전의 타격을 만회했을 뿐 아니라
회사의 앞날을 밝혀주는 등대역할을 했다.
이 제품의 성공이 발판이 돼 박사장의 패시픽 프레미어사는 이제 연간
350만달러의 외형에 북미지역 8개 영업망을 거느린 중견 무역업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아직도 박사장에게 캐나다에서의 무역업은 결코 쉽지 않다.
"세계굴지의 회사들과 경쟁해야하며 매상이 늘면 그만한 양의 재고와
외상이 쌓인다"고 그는 말한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인종장벽이다.
유색인종에 대해 은근히 우월감을 갖고 있는 캐나다인을 고용하고
캐나다인을 상대로 장사하자니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쉽게 돈을 벌려고 했으면 이미 무역업에서 손을 뗐을 것이라고 한다.
식품점이나 햄버거가게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하는데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2세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이 그를 지탱시켰다.
늘 궂은 일부터 앞장선다는 박사장은 세가지의 사업신조를 갖고 있다.
첫번째 사업신조는 지식.
"아는 것이 힘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도 이론적인 면에서 캐나다 직원들이나 바이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매일 이 곳에서 발행되는 일간지와 경제지를 읽으며
쉬지 않고 공부하고 있다.
그는 또 하나의 사업성공조건으로 근면성을 꼽는다.
윗사람이 어려운 일에 솔선수범하면 부하직원들은 자연히 상사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박사장의 세번째 사업신조는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기고 그들의 복지후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의 회사직원들은 한국식으로 퇴근후나 주말에도 일하는 때가 많다.
처음에는 이런 근무여건에 대해 현지채용인들의 불만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박사장이 그들을 한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니 차차 한국식
경영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또 사장 스스로 물건을 나르고 힘든일에 솔선수범을 보이니까 그들도
이에 감동해 회사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더라는 것이다.
한국교포들은 누구나 그의 회사에 가면 창고에 쌓인 물건을 보고 놀라고
그가 한국식으로 직원들을 부리는 것을 보고 놀란다.
대부분의 이민 1세들이 동네구멍가게나 소매상으로 현지조달품을 취급하는
현실에서 그는 한국물건을 파는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우뚝 서 있다.
< 손상우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