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 중국인의 해외거주는 본토정부가 해외이민을 장려한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해외로의 인구이동을 방치하지 않는다"는 정책도 수시로 있었다.

명의 홍무제는 관청의 허가없이 큰 배를 만들어 출해하는 것을 금지했다.

강희제는 1712년 해외이주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해외에 이주한
중국인의 철수까지 명령했다.

이들 중국권력자는 "해외이민을 공인할 경우 커다란 위험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청조의 경우 해외이민을 방치하는것은 청의 정세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여겼다.

국내 정세가 외부에 알려질때 외적의 침입을 초래할 위험이 있고 반체제
분자가 해외거점을 구축할 우려가 있다고 본것이다.

또 해적을 연안에 출몰시켜 해안방위선을 무력화시키거나 선박 쌀을 해외로
유출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때문에 청조의 대청율례는 "관원 병민으로 허락없이 해외무역을
하거나 해외에서 거주 경작하는 자는 모두 통적행위로 간주해 참수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당시로선 아주 엄한 법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외이민 억제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청조는 화이질서에 유교적인 사회
윤리를 결합시켰다.

해외이민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인 제사및 가족의무를 포기하는
불량무뢰배라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청조(옹정제,1927년)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고향을 떠나
해외에서 표류하는 자는 본분을 다하지 않는 자"로 규정하고 가차없는 처벌
을 명했다.

이와함께 해외이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기민정책의 구실도 포함돼 있었다.

이바람에 중국정부가 모순에 빠진 일도 있었다.

174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폭동을 일으킨 중국인 9,000명을 살해했다는
보고를 접하고도 청조는 아무런 대응조치를 취할수 없었던 것.

베트남정부도 1775년 중국인 수만명이 근무하던 광산시설을 파괴, 중국인
다수가 사망했으나 이에 항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광산시설에서 도주했다가 중국으로 돌아온 중국인 수천명을
범죄자로 취급해 유배형을 내렸다.

그러나 해외이민을 금지하던 시대에도 이민행렬은 계속됐다.

해외이민금지가 대외무역을 축소할 목적으로 설정된 정책이 아닌 이상
해외교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공형식에 의해 외국상인의 무역을 인가하는 대신 중국상인에게 대외무역
및 연해무역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이들 중국인이 해외에 장기체류하거나 영원히 그곳에 정착한 것이다.

현재 해외화교의 상당수가 중국의 이민정책금지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