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관 대문을 들어선 대옥이 여전히 자견의 부축을 받으며 대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 길은 이끼가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고 잔디처럼 덮여 있었다.

그 길을 보자 대옥은 문득 얼마 전에 보옥에게서 빌려 읽은 "서상기"
한 구절이 생각났다.

이렇게 외진 곳에 누가 온단 말인가.

푸른 이끼 덮인 땅에 차갑고 흰 이슬뿐이네.

그 구절과 관련하여 "서상기"의 주인공 앵앵의 애처로운 운명이 떠올라
대옥은 마음이 더욱 우울해졌다.

어제 저녁에는 보옥이 헌 손수건을 보내준 뜻을 헤아리고 밤잠을
설칠 정도로 행복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행복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마음이 변덕스럽기만 했다.

보옥의 호의와 사랑을 느끼면 느낄수록 부모도 없는 자기의 처지를
돌아보게 되고 보옥과는 결국 사랑이 이루어질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찾아드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서상기"의 앵앵보다 대옥 자신의 신세가 더 가련한 것
같기도 했다.

앵앵은 비록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못하고 일생 동안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삶을 살았지만,그래도 어머지가 있었고 남동생이
있지 않았던가.

또 함께 해로하는 남편이 있지 않았던가.

대옥은 보옥과 헤어지게 되면 결혼도 하지 못하고 영영 혼자 살아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얼마 못 살고 요절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횃대 위에 앉은 앵무새가,
"휴" 하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순간 대옥은 깜짝 놀라며 앵무새를 올려다 보았다.

대옥이 막 한숨을 내쉬려고 하는데 앵무새가 대신 그 일을 해준 셈이다.

내가 얼마나 한숨을 자주 쉬었으며 앵무새가 내 표정만 보고도 대신
한숨을 내쉬는 것일까.

대옥은 앵무새마저 슬프게 만들고 있는 자신이 싫기만 했다.

앵무새가 또 대옥이 종종 읊는 자작시를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네가 죽어서 내가 묻어주지만 이 몸 어느 날 죽으면 그 누가
묻어줄까 봄이 왔다 가듯이 꽃이 피었다 지듯이 사람도 한번 왔다가 가고
말 것을 대옥이 귀를 막으며 자견에게 소리쳤다.

"앵무새 횟대를 벗겨다가 건넌방 창밖에다 걸어 놓아라"

앵무새는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시 한 번 잘못 읊는 바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앵무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횟대에 실려 대옥이 지시한 곳으로
옮겨졌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