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해안에 표류해온 것은 1653년8월16일 이른 새벽이었다.
제주목사 이원진은 이들이 나가사키로 가던 알아낸뒤 이종에게 하멜일행이
표류해 왔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회보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들을
극진하게 보호했다.
"목사는 우리환자들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는데 아마 기독교.신자들
한테서도 이교도인 이목사가 베풀어준 것보다 나은 대우는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멜이 이렇게 적어놓은 것을 보면 제주목사는 특히 부상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하멜일행은 이 지역에서 뜻밖에도 동포를 만난다.
그는 네덜란드북부 리프출신인 "얀 얀세 벨테브레로서 박연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에 귀화해 훈련도감의 전관이었던 그는 1628년 제주도에 표류한
배에서 물을 구하러 상륙했다가 사로잡힌뒤 25년동안 서울에서 살면서
조선여인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둔 58세의 중년노인이 돼 있었다.
효종의 어명에 따라 하멜일행은 서울로 이송돼 국왕친위대의 조총수로
3년정도 일한다.
두사람이 청나라사신에게 고국으로 보내줄 것을 청원하는 바람에 하멜
일행은 순천(5명) 남원(5명) 여수(12명)에 각각 이송돼 병사밑에서 10년
동안 일한다.
하멜은 여수의 전라 좌수영에서 오랜 준비끝에 낡은 어선 한 척을 사들여
1666년 9월4일 밤 동료7명과 함께 나가사키로 도주했다.
그로부터 2년뒤인 1668년에는 조선에 남아있던 일행8명도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갔다.
하멜이 귀국해 쓴 모험담과 조선견문록을 적은 책이 조선을 서구에 처음
알린 "하멜표류기"이다.
제주도가 네덜란드와 관광교류를 강화하기위해 옛날 제주도에 표류해왔던
하멜과 벨테브테의 후손과 친척찾기운동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후손을 찾는대로제주도에 초청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자치단체와 자매결연도
맺을 계획이라고 한다.
하멜의 귀국직후인 1669년 동인도회사는 "꼬레아""라는 이름의 배를
만들어 조선과의 무역을 시도하려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꼬레아"로는 정작
조선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이 그당시 문호개방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