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신라금불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불교가 한창 흥성했던 통일신라시절의
고도경주의 모습을 "사사성장 탑탑안행"이라는 글귀로 표현해 놓았다.
절이 별처럼 퍼져 있고 탑이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듯 했다니,
신라불교의 위용을 이처럼 잘 그려놓은 글귀는 다시 없을성 싶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찰의 경칭만도 100여개나 되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경주에 있던 절이었다는 사실은 경주가 한국불교의
본향이었다는 것을 대변해 준다.
7세기 무렵에는 경주의 남산까지 불교의 도량화 되어 평탄한 자리가
있으면 절을 짓고 탑을 쌓아으며 적당한 바위를 보면 불상을 새겼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주에 남아있는 탑의 수는 통일신라시대에 남아있던
탑의 수효의 몇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 불상의 예는 더 적다.
바 위에 새긴 경우에는 이동이 불가능해 그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지만
다른 불상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특히 배불사상이 풍미했던 조선시대에는 석조불상들이 수난을 당해
거의다 불두가 날려나갔다.
지금도 경주에 가면 목이 잘린 석조불상들을 많이 볼수 있는것은
그때문이다.
경주에는 지금 금동불로 전해오는 것이나 출토된것이 적다.
신라의 조각이 가장 완숙했던 8세기 작품으로 다른곳에서는 볼수 없는
불국사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높이 66m)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77m), 백률사의 "금동약사여래좌상" (2.8m) 등의 걸작금동불3구가
전해오고 있다.
땅속에서 나온것으로는 79년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높이 9.3cm의
"금동여래입상"과 성건리출토 "반가상" 등이 있을 뿐이다.
순금으로 만든 금불은 1942년 황복사지3층석탑사리함에서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조성된 "여래좌상" 2구가 최초로 발굴됐다.
192년 <>문왕이 죽자 명복을 빌기위해 이 탑을 세웠고 성덕왕5년
(706)에 다시 이탑속에 금불1구를 넣었다는 기록이 사리함에 새겨져
있다.
경주시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함 체서 나온 금불보다 시대가 조금
앞서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금불한구가 나왔다.
높이 4cm, 무게 22g의 작은 것이기는 해도 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해방뒤에 나온 첫 금불이다.
특히 함께 나온 "9층소탑"은 "황룡사9층목탑"의 형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이탑의 복원을 꿈꾸고 경주시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금불은 지상의 탑에서 나온것이지만 경주의 지하는
아직 수많은 중요 문화재들이 묻혀 있는 박물관이다.
그런데도 건교부는 그위로 고속철도를 놓겠다는 고집을 꺾지않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3일자).
고도경주의 모습을 "사사성장 탑탑안행"이라는 글귀로 표현해 놓았다.
절이 별처럼 퍼져 있고 탑이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듯 했다니,
신라불교의 위용을 이처럼 잘 그려놓은 글귀는 다시 없을성 싶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찰의 경칭만도 100여개나 되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경주에 있던 절이었다는 사실은 경주가 한국불교의
본향이었다는 것을 대변해 준다.
7세기 무렵에는 경주의 남산까지 불교의 도량화 되어 평탄한 자리가
있으면 절을 짓고 탑을 쌓아으며 적당한 바위를 보면 불상을 새겼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주에 남아있는 탑의 수는 통일신라시대에 남아있던
탑의 수효의 몇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 불상의 예는 더 적다.
바 위에 새긴 경우에는 이동이 불가능해 그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지만
다른 불상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특히 배불사상이 풍미했던 조선시대에는 석조불상들이 수난을 당해
거의다 불두가 날려나갔다.
지금도 경주에 가면 목이 잘린 석조불상들을 많이 볼수 있는것은
그때문이다.
경주에는 지금 금동불로 전해오는 것이나 출토된것이 적다.
신라의 조각이 가장 완숙했던 8세기 작품으로 다른곳에서는 볼수 없는
불국사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높이 66m)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77m), 백률사의 "금동약사여래좌상" (2.8m) 등의 걸작금동불3구가
전해오고 있다.
땅속에서 나온것으로는 79년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높이 9.3cm의
"금동여래입상"과 성건리출토 "반가상" 등이 있을 뿐이다.
순금으로 만든 금불은 1942년 황복사지3층석탑사리함에서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조성된 "여래좌상" 2구가 최초로 발굴됐다.
192년 <>문왕이 죽자 명복을 빌기위해 이 탑을 세웠고 성덕왕5년
(706)에 다시 이탑속에 금불1구를 넣었다는 기록이 사리함에 새겨져
있다.
경주시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함 체서 나온 금불보다 시대가 조금
앞서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금불한구가 나왔다.
높이 4cm, 무게 22g의 작은 것이기는 해도 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해방뒤에 나온 첫 금불이다.
특히 함께 나온 "9층소탑"은 "황룡사9층목탑"의 형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이탑의 복원을 꿈꾸고 경주시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금불은 지상의 탑에서 나온것이지만 경주의 지하는
아직 수많은 중요 문화재들이 묻혀 있는 박물관이다.
그런데도 건교부는 그위로 고속철도를 놓겠다는 고집을 꺾지않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