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권진..."

젊은 여성의 수인사에 멈칫했던 나는 곧 TV에서 여러 차례 보았던 가수
권진원인 것을 알아 차릴수 있었다.

"아! 권진원씨 잘 있었어?"

"선생님 저를 기억하세요?"

"그럼, 그 때 강의실에서 노래도 시켰잖아?"

뒤따라 방에서 나오던 가수 유열이 또 내게 인사를 했다.

그날 밤 방송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둘은 모두 84학번이란다.

권진원은 내 강의를 들었고 유열은 아마 내게 배운 일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와 나는 몇년전에 내가 어떤 방송 프로그램에 열심히 출연할
때 만난 일이 있다.

지난 5월21일 MBC 청소년 음악회가 우리학교(외대) 이문동 캠퍼스에서
열렸는데 그 때 방송에 출연하려 왔던 그들을 나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돌이켜 보면 내가 강의실에서 권진원의 샹송을 들은 것은 아마 85년 봄이나
가을 학기쯤인 것같다.

그때 나는 어느 방송국에서 실시한 가요제에서 외대 화란어과 2학년
여학생이 은상을 받았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아주 간단한 보도였지만 나는 그 기사를 읽는 순간 어쩌면 그 학생도
내 클라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교양 강의 "과학사" 시간에는 수백명의 2학년 수강생이 몰려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하루 이틀 뒤의 강의시간에 나는 혹시 그 학생이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든 여학생이 바로 권진원이었다.

나는 강의 시작전에 그 학생을 물러 앞에 세워 노래를 시켰고 학생이
많아 강당에서 진행되는 내 강의수강생들은 그날 병아리 가수의 노래를
반주도 없이 들을수가 있었다.

아마 가요제에서 불렀던 것이겠지만, "파리의 달리 밑"인가 하는 샹송을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는 나는 그 여학생을 거의 완전히 잊고 지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 뒤일까? 어느 TV음악방송을 보다가 어느 여자 가수가
샹송을 부르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후 바로 다른 방송
에서 그의 학교와 가정에 대한 소개를 보고 이 가수가 바로 내가 강의실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던 그 여학생인 걸 알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후 생각만 나면 나는 지금의 내 강의 듣는 학생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했다.

그가 방송에 출연한 것을 본 다음날 쭘의 강의라면 틀림없이 "과학사"
강의실에서 샹송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나는 강의 시간에 비슷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한다.

바로 내 "과학사" 강의를 들은 선배들이 여기저기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는 것은 강의 시간의 내 즐거움이기고
하다.

또 학생들에게는 좋은 거울도 될 것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TV나 신문을 통해 등장하는 대중문화의 영웅들이 더 화제가 된다.

지금까지 내 "과학사" 강의를 들은 학생은 외대에서만도 1만5,000명이
넘는다.

그많은 제자들 가운데 각부문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 분명하다.

그날 음악회에 출연하러 왔던 오성식"군"도 먼저 인사를 걸고 내 과학사를
들었다고 말해 주었다.

지금은 오성식"씨"가 되어 영어 교육의 대중화에 크게 활약하고 있는 그
역시 유열씨, 권진원씨나 마찬가지로 대중의 스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중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내게는 자랑스런 제자들이
얼마든지 많다.

피자집을 시작해 성공하고 있는 제자는 이번 스승의 날 피자와 포도주를
집으로 보내 준 일도 있고, 주택공사 간부 한분은 스승의 날이라고 축전을
보내 주었으며 전북대 교수로 있는 제자 한사람은 집으로 전화를 걸어주기도
했다.

그저 자랑스럽고 고맙기 짝이 없다.

그러나 어디 이런 제자들만 자랑스런가?

아내 심부름을 슈퍼에 갔다가 장보러 온 30대주부 제자의 인사를 받기고
하고 우체국에서는 아이를 안고있는 젊은 새댁 제자가 인사를 건네주기도
한다.

그리고 외국에 간다고 공항에라도 나가면 인사받는 일은 더 많아진다.

아직 스튜디어스 제자는 만난 일이 없지만 내가 만났던 대한항공의
남자승무원 제자는 비행중 술 한잔이라고 더 주려고 몇번이고 내 주변을
기웃거려 주었다.

그날따라 하필 만원이어서 앞자리로 옮겨 드릴수가 없다고 안타까워
하면서..

맹자의 "군자 삼락"의 한가지를 나는 정말로 마음껏 즐기며 살고 있다.

천하의 영재를 모아가르치는 즐거움은 유명한 가수 제자를 만나서만이
아니라 우체국 안에서도, 외국의 항공대합실에서도 얼마든지 즐길수 있는
것이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할수 없는 이 많은 제자들의 간단한 아는체 한마디가
나를 충분히 기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