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나 <영화평론가 / 동국대 교수>

요즘 세계화란 말이 아무데나 쓰이다보니 그 진정한 의미조차 느끼기
힘들게 되버렸다.

그 덕에 영어 제일 못하는 나라중 하나라는 한국에선 어린에부터
직장인까지 영어 배우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대기업에선 합숙 영어학습코스까지 있고, 영어 못하면 승진에
지장있는 영어화 시대가 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땅의 세계화는 그달픈 영어 배움의 길로 뒤틀어지는 야릇한
현상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영화평론가인 필자로선 정말 이상한게 있다.

세계화와 영어배우기에 관심 많은 한국 비지니스맨들이 골프이야기엔
자신이 있지만 영화이야기만 나오면 대부분 후럼구처럼 이렇게 말한다.

"옛날 영화가 좋았지! 요즘 영화는 여운이 없어 "혹은 "바빠서 영화를
시간이 있어야지"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내가 만났던 서구의 비지니스맨들은 최신 영화를
하다못해 비행기 속에서라도 보거나 비디오로라도 보면서 요즘 영화를
대충 따라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파티나 사석에선 일부러 비지니스보다는 영화나 다른 화제를
즐긴다.

사실 비지니스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텐데 한국의
비지니스맨들은 너무 바빠서 자기가 속한 집단 외의 문화나 삶에 대해서는
이해할 시간조차 없는게 문제다.

퇴근후 이러저러한 이유로 술자리를 가져야하고 주말엔 비지니스와
관련되서 혹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골프나 낚시, 등산을 한다.

부지런한 이라면 새벽에 출근해 영어공부를 해야 한다.

빡빡한 스케줄 속에 시간때우기용 오락이라고 여기는 영화보기가 끼여들
틈이 없는건 당연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잊고있다.

영화는 예술이고 오락이기 이전에 인간의 다양한 삶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구체적인 매체이면서 인간정신의 타락과 구원이라는 양극단에
걸친 스펙트럼을 가진 매체라는 사실말이다.

영어를 잘하면 뭐하나? 관광가서 쓸려고 그렇게 힘들게 영어를 배운것도
아닌데, 정작 상대방과 즐겁게 나눌수 있는 대화거리가 없어 영어를 제대로
못쓴다면 말짱헛것 아니나? 영어는 하는데 비지니스 이야기 외엔 화제가
없는 이라면 제대로 된 이러 문화권의 영화를 보는게 직효이다.

거기에는 다른 언어와 다른 생활양식,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인간들의
다른 삶과 다른 문제들이 2시간 내외의 시간동안 완결된 영화보기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세계화의 본질이란 게 한국밖의 문화권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떨 삶을 영위하는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상호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있는 것인데, 정작 그것이 자신의 삶을 풍요하고 즐겁게 만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영화보기는 분명
즐겁게 세계화의 길에 들어서는 방법이 될수 있다.

외국 비지니스맨에게 한국의 친절한 접대 문화를 보여준다고 요정으로
모셔 한국여성의 상품화를 자랑하기보다 같이 본 공통의 영화를 놓고
서로의 다름과 같음을 화제에 올려보는 문화적인 비지니스 사교술, 그런게
가능하다면 스트레스 받는 세계화가 즐거운 세계화가 될수도 있다.

아직은 영화보기 싫은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이 전세계적으로
많으니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