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첨단제품개발에 주력할 것인가.

아니면 범용제품이라도 당장 팔리는 물건을 만들것인가"

국내 전자업체들이 딜레마에 빠졌다.

애써 개발한 첨단기기들이 시장에서 맥을 못추고 있어서다.

제품에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다.

문제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다.

첨단기기라는 하드웨어를 활용할 소프트웨어가 따라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업계가 하드웨어를 개발하지 않을 수도 없다.

첨단기기 개발을 늦춘다는 것은 멀티미디어등 "전자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기술개발 추세에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한 것.

소프트웨어의 함량 미달로 빛을 잃고 있는 대표적 상품은 8배속 CD(콤팩트
디스크)롬 드라이브.

CD롬 드라이브는 컴퓨터의 보조기억장치다.

기존 플로피 디스크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지난해 2배속 제품이 대히트를 친 뒤 정보전달 속도가 빠른 4배속 6배속
등의 제품이 잇달아 선을 보였다.

지난달초에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초고속 기능을 가진 8배속 제품을
국내시장에 출시했다.

그런데 8배속 제품은 국내시장에 선보인지 두달이 안된 지금 값이 10만원
대로 절반이상 떨어졌다.

그 이유는 하드웨어는 8배속인데 소프트웨어는 2배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구성돼 8배속 CD롬
드라이브는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효과는 볼 수 없는 이 제품이 팔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용산전자상가 P상회 S사장)

삼성과 LG는 서둘러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자사의 PC에 버퍼( buffer )라는 특수장치를 탑재하기 시작한 것.

이 장치는 CD롬용 소프트웨어가 8배속 CD롬의 속도에 맞춰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가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이 성공할 지는 의문이다.

"자전거와 자동차의 달리는 속도를 일치시키겠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S컴퓨터 관계자)는 것.

8배속 CD롬 드라이브만이 아니다.

비디오CD도 소프트웨어 부족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제품은 영화등 움직이는 화면까지 디지털 방식으로 CD에 담아 선명하게
볼 수 있는게 특징이다.

따라서 VTR를 대체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모았다.

하지만 시장에서 나타난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삼성 LG 현대 대우등 전자4사의 지난해 판매 물량은 평균 1천5백대 정도다.

회사별 연간 VTR 평균 판매대수(50만대)의 1%에도 못미친다.

이처럼 판매가 부진한 것은 소프트웨어가 움직이는 화면을 자연스럽게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화면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소프트웨어가 최소한 동화상에 대한
국제 규격인 MPEG-2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국내에서 나온 제품은 한단계 뒤진 MPEG-1 수준이다" (전자산업
진흥회 박재인 상무).

몸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니까 안팔린다는 얘기다.

아예 개발만 하고 생산을 포기한 제품도 나오고 있다.

DCC(디지털 콤팩트 카세트)나 MD(미니 디스크)등이 그 예다.

삼성 LG 대우는 모두 이 제품들을 개발했으나 양산을 포기했다.

DCC와 MD가 갖고 있는 장점을 활용할 만한 기반이 안갖춰져 판매부진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제품은 듣기 전용인 일반 CD와는 달리 녹음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것을 그대로 녹음, 좋은 음질로 즐길 수 있어
일본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위성방송등 고음질의 방송이 안돼 녹음을 해봐야
그게 그것"(삼성전자 관계자)이다.

결국 업체들로서는 돈을 버는데까지는 나가지 못하고 기술을 확보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메이커들로서는 답답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소프트웨어를 함께 만들자니 너무 버겁다.

솔직히 "하드웨어의 기술 발전을 쫓아가기도 힘들다" (LG전자 K상무).

그렇다고 첨단기술 개발에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예컨대 "CD롬 제조기술은 바로 차세대 영상기기인 DVD(디지털 비디오
디스크)롬을 만들 수 있는 기술로 이어진다"(삼성전자 관계자)는 말에서
이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이같은 문제는 결국 국내 전자산업의 취약한 구조에서 발생했다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국내에는 이렇다할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업체와 인력이 절대 부족하다"
(전자산업진흥회 이상원 부회장)는 것.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균형있게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적 지원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기형적인 제품이 양산될 수
밖에 없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정부와 업계는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 조주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