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7) 원종성 <포르투갈 'A.P.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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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의 끝자락 포루투갈.
5백여년전 신세계 탐험을 위해 콜럼버스를 파견하는 등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이 나라에도 어김없이 한국인의 상혼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 곳에서 신시장 개척에 나선 한국인은 원종성.
그가 처음으로 포루투갈에 발을 내딛은 때는 지난 72년.
병아리 감별사 자격증 하나만을 믿고 "젊은 나이에 무엇을 못하랴"는
심정으로 리스본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동양의 이방인에게 포루투갈은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 곳 저 곳 직장을 알아보다 그래도 전공이 전공인지라 병아리 감별회사에
첫 둥지를 틀었다.
72년에 시작된 직장생활은 80년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있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굴뚝 같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과감히 사표를 던질 수
없었다.
80년부터 시작된 그의 개인사업은 15년만에 자본금 1억2천5백만원 규모의
쨈업체( H.WON )와 4,500만원규모의 양돈회사( A.P.WON )로 성장했고 그는
이제 포루투갈에서 인정받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같은 성공에 힘입어 그는 다시 1억5,000만원의 자본금으로 가구사업
( Mobiliario.won )을 시작하려 한다.
원사장은 특히 현지인과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한.포루투갈간의
민간 경제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84년에는 한국 외무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원사장이 이렇게 변신하기까지는 나름대로 우여곡절이 있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 욕구와 현실적인 여건, 이 둘 사이에서 몇날을
고민하던 끝에 80년 어느날 마침내 "가진 것도 없는 내 처지에 잃을 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결론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강력한 도전 욕구가 솟았다.
일단 새사업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정은 했지만 문제는 과연 어떤 업종을
선택할 것인가였다.
이리 저리 궁리 끝에 "그래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생각에 차고를 천연옥수수쨈(한국의 조청)공장으로 개조하기로 했다.
일단 사업결정을 하고난 후 그 다음 문제는 공장설립 절차.
현지 사업절차에 어두운 그로서는 공장설립절차가 무척 까다로울 것 같아
처음에는 그냥 무허가로 공장을 운영해 볼까도 고려해 봤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일 뿐 아니라 한국인
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용기를 내 현지업무처리기관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놨더니 의외로 상담에
응한 직원은 사업허가절차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고 관련 구비서류까지
건네 주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공장 설계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공장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공장 설계서"가 꼭 필요하다는 담당자의
말이었다.
다행히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공장 설계서"를 그럴 듯 하게 작성해
다른 구비 서류와함께 현지관청(군청)에 제출할 수 있었다.
서류를 접수한 군청 담당직원은 구비서류를 한참동안 뒤적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최종 허가기관인 상공부에서 조만간 현장심사를 나갈 것이니
심사받을 준비를 하라"고 알려 주었다.
군청에 서류를 접수한지 한달쯤 후 아니나다를까 "상공부에서 공장 현장
심사를 나왔다"며 심사원인 듯한 사람이 원사장을 방문했다.
심사원을 공장(8평 정도의 차고)으로 안내했더니 원사장이 제출한 "공장
설계서"와 공장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한참동안 말을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허가를 받기는 틀렸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심사원이 불쑥 "내 평생에
이런 작은 공장은 처음 봅니다.
그래도 잘 정돈돼 있군요.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 보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포루투갈"이라는 이국땅에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후 인근 토지를 매입해 미니공장을 건축하던중 자금부족난에 부딪히게
됐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나" 궁리하던차에 현지인 친구로부터 이 곳
중소기업육성국의 무이자 융자 프로그램에 한번 응모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때 당시 포루투갈은 융자받기 어려운 나라였고
담보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을까"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현지인 친구의 거듭되는 권유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중소기업
육성국의 문을 두드렸다.
상담직원은 상세한 설명과 함께 1차 구비서류와 함께 사업타당성 검토를
위해 필요하니 "경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경제 보고서"란 용어는 그때까지 병아리 감별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원사장에게는 낯설고 거리가 먼 단어였다.
"체념할까"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중소기업국을 다시 찾아가 문제의
"경제 보고서"작성방법을 문의했더니 담당직원이 아주 자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가지 자료를 건네 주었다.
얻어온 자료를 집에 가지고 와서 몇일밤을 꼬박 지새우며 보고 또
보고나서 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다.
의심나는 곳은 현지인 친구에게 물어보며 고생끝에 A4규격 42페이지
분량의 "경제 보고서"를 완성했다.
언어표현상 서투르고 미숙한 점이 많아 괜히 접수창구에서 창피만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를 한참이나 살펴보던 접수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 보고서를
누가 작성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원사장이 "내가 작성했노라"고 하자 접수원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다"며 조만간 현장심사를 나갈 테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몇일 후 심사를 나온다는 연락을 받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위스키와
안주"를 준비하고 심사원을 기다렸다.
제 시간에 맞춰 공장을 찾아온 심사원은 이것 저것 상세히 묻고 나서
차고를 개조한 공장을 이곳 저곳 샅샅이 들여다 보았다.
일을 마치고 "결과는 몇일 후에 알려주겠다"고 말하며 돌아가는 심사원을
붙잡고 "한 잔 하시죠"했더니 그는 매우 당황해 하며 "이러면 안된다"고
얼굴을 붉히며 돌아가 버렸다.
잘 보이려고 술상을 마련한 것이 오히려 민망스런 일이 돼버렸다.
이후에도 기회를 보아 몇번 식사에 초청하려 했으나 그 심사원은 항상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몇일 후 그로부터 "당신의 프로젝트( Projecto )가 통과된 것을 축하
한다"는 연락이 왔다.
원사장은 뛸 듯이 기뻤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중소기업육성국의 무이자 융자프로그램 경쟁률이
25대1이었다고 하니 현지어도 서툰 원사장이 작성한 서류가 심사를 통과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원사장은 중소기업육성국으로부터 당시 미화 5만달러를
4년간 무이자로 빌러 쓸 수 있게 돼 차고를 진짜 "쨈공장"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
공장 개업식날 전에는 그토록 개인적으로 만나려 해도 만나주지 않던
중소기업육성국 심사원이 찾아와 따뜻하게 격려까지 해 주고 원사장이
권하는 잔을 흔쾌히 받아 마시며 "비바 코리아노(한국인 만세)"를 외쳤다.
원사장은 "물론 이곳에도 부조리가 있겠지만 내가 만났던 포루투갈
공무원들은 모두 정직하고 법집행에 엄격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후에도 현지 군청과 관공서에 있는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사로운 일까지도 이들과 상의해 처리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85년에는 "포루투갈 산업발전 특별 프로그램"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미화로 6만달러를 5년간 무이자로 융자받아 사업을 확장했다.
"쨈공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원사장은 92년에는 " A.P.WON "이라는
양돈회사를 설립했다.
이때도 미화 6천달러를 무상으로 지원받았다.
그리고 올해 추진하고 있는 가구공장 설립을 위해 "SIR 프로그램"에 미화
30만달러 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중소업체들의 대포루투갈 투자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가 "쨈공장"설립을 위해 융자를 요청할 때와는 달리 종목과 투자타당성에
대한 사전건증이 그렇게 까다롭지 않아 융자받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현지에 생산공장 설립시 투자금액의 약 40%를 무이자로 융자받을 수
있는데 이경우 내.외국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포루투갈 투자시 성공가능성이 높은 또하나의 이유는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여타 유럽연합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현지 근로자들의 최저임금은 한화 26만원정도다.
현재까지의 추세로 보아 이런 임금수준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그는 대포루투갈 투자유망종목으로 생산분야 관광산업 운송산업 등을
꼽는다.
이들 종목의 경우 대부분 정부의 무상 보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중소기업지원을 위한 포루투갈 정부의 혜택을 우리업체들이 더 많이
받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하여튼 그는 92년도에 "쨈공장"에서 2억원, 양돈공장에서 7,500만원을
올리는 등 포루투갈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는 9,000만원을 출자해 현지인과 합작으로 가구공장 설립을
추진중이다.
그는 포루투갈 여인과 결혼해 현재 1남2녀를 두고 있으며 현지인들과는
매우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지인들은 그를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업가로 보고 있으며 그가
운영하는 회사에 대해서도 매우 내실있는 회사로 평가하고 있다.
< 손상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7일자).
5백여년전 신세계 탐험을 위해 콜럼버스를 파견하는 등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이 나라에도 어김없이 한국인의 상혼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 곳에서 신시장 개척에 나선 한국인은 원종성.
그가 처음으로 포루투갈에 발을 내딛은 때는 지난 72년.
병아리 감별사 자격증 하나만을 믿고 "젊은 나이에 무엇을 못하랴"는
심정으로 리스본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동양의 이방인에게 포루투갈은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 곳 저 곳 직장을 알아보다 그래도 전공이 전공인지라 병아리 감별회사에
첫 둥지를 틀었다.
72년에 시작된 직장생활은 80년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있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굴뚝 같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과감히 사표를 던질 수
없었다.
80년부터 시작된 그의 개인사업은 15년만에 자본금 1억2천5백만원 규모의
쨈업체( H.WON )와 4,500만원규모의 양돈회사( A.P.WON )로 성장했고 그는
이제 포루투갈에서 인정받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같은 성공에 힘입어 그는 다시 1억5,000만원의 자본금으로 가구사업
( Mobiliario.won )을 시작하려 한다.
원사장은 특히 현지인과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한.포루투갈간의
민간 경제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84년에는 한국 외무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원사장이 이렇게 변신하기까지는 나름대로 우여곡절이 있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 욕구와 현실적인 여건, 이 둘 사이에서 몇날을
고민하던 끝에 80년 어느날 마침내 "가진 것도 없는 내 처지에 잃을 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결론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강력한 도전 욕구가 솟았다.
일단 새사업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정은 했지만 문제는 과연 어떤 업종을
선택할 것인가였다.
이리 저리 궁리 끝에 "그래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생각에 차고를 천연옥수수쨈(한국의 조청)공장으로 개조하기로 했다.
일단 사업결정을 하고난 후 그 다음 문제는 공장설립 절차.
현지 사업절차에 어두운 그로서는 공장설립절차가 무척 까다로울 것 같아
처음에는 그냥 무허가로 공장을 운영해 볼까도 고려해 봤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일 뿐 아니라 한국인
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용기를 내 현지업무처리기관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놨더니 의외로 상담에
응한 직원은 사업허가절차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고 관련 구비서류까지
건네 주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공장 설계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공장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공장 설계서"가 꼭 필요하다는 담당자의
말이었다.
다행히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공장 설계서"를 그럴 듯 하게 작성해
다른 구비 서류와함께 현지관청(군청)에 제출할 수 있었다.
서류를 접수한 군청 담당직원은 구비서류를 한참동안 뒤적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최종 허가기관인 상공부에서 조만간 현장심사를 나갈 것이니
심사받을 준비를 하라"고 알려 주었다.
군청에 서류를 접수한지 한달쯤 후 아니나다를까 "상공부에서 공장 현장
심사를 나왔다"며 심사원인 듯한 사람이 원사장을 방문했다.
심사원을 공장(8평 정도의 차고)으로 안내했더니 원사장이 제출한 "공장
설계서"와 공장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한참동안 말을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허가를 받기는 틀렸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심사원이 불쑥 "내 평생에
이런 작은 공장은 처음 봅니다.
그래도 잘 정돈돼 있군요.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 보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포루투갈"이라는 이국땅에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후 인근 토지를 매입해 미니공장을 건축하던중 자금부족난에 부딪히게
됐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나" 궁리하던차에 현지인 친구로부터 이 곳
중소기업육성국의 무이자 융자 프로그램에 한번 응모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때 당시 포루투갈은 융자받기 어려운 나라였고
담보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을까"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현지인 친구의 거듭되는 권유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중소기업
육성국의 문을 두드렸다.
상담직원은 상세한 설명과 함께 1차 구비서류와 함께 사업타당성 검토를
위해 필요하니 "경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경제 보고서"란 용어는 그때까지 병아리 감별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원사장에게는 낯설고 거리가 먼 단어였다.
"체념할까"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중소기업국을 다시 찾아가 문제의
"경제 보고서"작성방법을 문의했더니 담당직원이 아주 자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가지 자료를 건네 주었다.
얻어온 자료를 집에 가지고 와서 몇일밤을 꼬박 지새우며 보고 또
보고나서 보고서 작성을 시작했다.
의심나는 곳은 현지인 친구에게 물어보며 고생끝에 A4규격 42페이지
분량의 "경제 보고서"를 완성했다.
언어표현상 서투르고 미숙한 점이 많아 괜히 접수창구에서 창피만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를 한참이나 살펴보던 접수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 보고서를
누가 작성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원사장이 "내가 작성했노라"고 하자 접수원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다"며 조만간 현장심사를 나갈 테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몇일 후 심사를 나온다는 연락을 받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위스키와
안주"를 준비하고 심사원을 기다렸다.
제 시간에 맞춰 공장을 찾아온 심사원은 이것 저것 상세히 묻고 나서
차고를 개조한 공장을 이곳 저곳 샅샅이 들여다 보았다.
일을 마치고 "결과는 몇일 후에 알려주겠다"고 말하며 돌아가는 심사원을
붙잡고 "한 잔 하시죠"했더니 그는 매우 당황해 하며 "이러면 안된다"고
얼굴을 붉히며 돌아가 버렸다.
잘 보이려고 술상을 마련한 것이 오히려 민망스런 일이 돼버렸다.
이후에도 기회를 보아 몇번 식사에 초청하려 했으나 그 심사원은 항상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몇일 후 그로부터 "당신의 프로젝트( Projecto )가 통과된 것을 축하
한다"는 연락이 왔다.
원사장은 뛸 듯이 기뻤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중소기업육성국의 무이자 융자프로그램 경쟁률이
25대1이었다고 하니 현지어도 서툰 원사장이 작성한 서류가 심사를 통과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원사장은 중소기업육성국으로부터 당시 미화 5만달러를
4년간 무이자로 빌러 쓸 수 있게 돼 차고를 진짜 "쨈공장"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
공장 개업식날 전에는 그토록 개인적으로 만나려 해도 만나주지 않던
중소기업육성국 심사원이 찾아와 따뜻하게 격려까지 해 주고 원사장이
권하는 잔을 흔쾌히 받아 마시며 "비바 코리아노(한국인 만세)"를 외쳤다.
원사장은 "물론 이곳에도 부조리가 있겠지만 내가 만났던 포루투갈
공무원들은 모두 정직하고 법집행에 엄격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후에도 현지 군청과 관공서에 있는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사로운 일까지도 이들과 상의해 처리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85년에는 "포루투갈 산업발전 특별 프로그램"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미화로 6만달러를 5년간 무이자로 융자받아 사업을 확장했다.
"쨈공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원사장은 92년에는 " A.P.WON "이라는
양돈회사를 설립했다.
이때도 미화 6천달러를 무상으로 지원받았다.
그리고 올해 추진하고 있는 가구공장 설립을 위해 "SIR 프로그램"에 미화
30만달러 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중소업체들의 대포루투갈 투자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가 "쨈공장"설립을 위해 융자를 요청할 때와는 달리 종목과 투자타당성에
대한 사전건증이 그렇게 까다롭지 않아 융자받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현지에 생산공장 설립시 투자금액의 약 40%를 무이자로 융자받을 수
있는데 이경우 내.외국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포루투갈 투자시 성공가능성이 높은 또하나의 이유는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여타 유럽연합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현지 근로자들의 최저임금은 한화 26만원정도다.
현재까지의 추세로 보아 이런 임금수준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그는 대포루투갈 투자유망종목으로 생산분야 관광산업 운송산업 등을
꼽는다.
이들 종목의 경우 대부분 정부의 무상 보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중소기업지원을 위한 포루투갈 정부의 혜택을 우리업체들이 더 많이
받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하여튼 그는 92년도에 "쨈공장"에서 2억원, 양돈공장에서 7,500만원을
올리는 등 포루투갈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는 9,000만원을 출자해 현지인과 합작으로 가구공장 설립을
추진중이다.
그는 포루투갈 여인과 결혼해 현재 1남2녀를 두고 있으며 현지인들과는
매우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현지인들은 그를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업가로 보고 있으며 그가
운영하는 회사에 대해서도 매우 내실있는 회사로 평가하고 있다.
< 손상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