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호 < LG경제연 대표이사 >

정부의 새로운 대기업 정책, 소위 "신재벌 정책"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에는 규모를 중시하여 다각화와 소유집중억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신정책은 상대적으로 규제완화를 통한 경쟁의 촉진과 경영의 투명성 확보를
주시하고 있다.

정부는 대기업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와 논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나 대기업
정책을 마련할 때는 다음의 사항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새로운 대기업 정책의 최우선 목표가 경쟁력 강화인지 형평의
제고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정책수단이 달라지고 국민들을
설득할 논리도 달라진다.

무한경쟁시대에 과연 어느 목표가 더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말해주고 있듯이 형평에 정책의 비중을 두면 둘수록
경쟁력과 생활수준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4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정세와 남북상황을 고려할때
경쟁력 확보를 통한 경제력의 증대는 우리에게 중요한 국가적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부지불식간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대립관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일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중소기업이 곤경에 처한 젓은 물론 한국경제의 온갖
폐혜는 모두 대기업 때문이다.

따라서 대기업 집단을 억눌러야만 중소기업이 살수 있다는 단순한
흑백논리에 빠지게 된다.

과연 대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이 진정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것인지,
체제논리나 경제논리에 적합한 정책인지 냉철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대기업의 발전이 중소기업의 발전으로 이어지도록 가능한 많은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정책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국내의 내노라 하는 대기업도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중기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자동차회사인 현대자동차의 1995년도 매출액은
GM이나 FORD사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며 대출액 순이익률 절반이
되지 못한다.

세째, 대기업은 역사적 산물이자 엄연한 현실적 실체임을 인정하고 정책을
펴야 한다.

우리나라 대기업 집단은 시대상황에 따른 정부의 경제정책과 기업가정신,
그리고 일부 정경유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생성되었다고 할수 있다.

우리사회의 모든 부문이 그러하듯이 대기업 집단도 불가피하게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문어발식 확장을 통한 규모의 급속한 확대, 정경유착에 의한 부의 축적,
가족중심의 소유및 지배구조가 대기업 집단에 가해지는 주된 비난이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급속한 성장에 필수적인 자본을 축적하고 모험정신과
경영력을 발휘하여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현실을 보아도 대기업 집단은 우리 경제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대기업은 일자리와 부가가치 창출의 가장 큰 원천이며 세계시장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선수라고 할수 있다.

대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환경의 개선과 실질적인 규제완화는
지지부진한 채 대기업의 무정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정부가 이를 단시간내에
고치려 한다면 효과도 의심서러울 뿐만 아니라 많은 부작용도 예상된다.

정부의 강요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10년내에 우리나라의 대기업 집단들은
정부나 국민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대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세계적인 경쟁이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대기업 집단을 위축시킬 수록 일부 구민들은 기분 좋아하고 외국의
경쟁기업들은 박수를 칠런지 모르나, 우리는 경쟁력과 시장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기업 문제는 감정이나 국민정서를 앞세운 강요나 당위론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정확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냉정히 계산하여 시간을
갖고 풀어가야 할 문제다.

네째, 시장에 대한 신뢰를 갖고 대기업 정책을 펴 달라는 것이다.

대기업이 시장 지배적 위치를 남용하여 공정경쟁 원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경우에는 철저히 단속하고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의 규모, 경영체제 조직구조 사업영역의 선택 등은 기본적으로
기업이 결정할 문제다.

극심한 국제경쟁 속에서 적자기업을 끌어안고 가는 대기업 집단, 핵심역량
없이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기업은 결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지 않고 무능한 오너가 제왕처럼 군림하는 대기업
집단도 결국 시장에서 패퇴하게 될 것이다.

정부가 걱정하고 국민들이 누살을 찌푸리는 많은 문제들을 시장은 경쟁
원리에 따라 큰 잡음없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정리해 줄 것이다.

시장을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자율성과 창의성, 그리고 효율성의 극대화를
가능케 하며, 진정한 국가경쟁력을 확보하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대기업들은 국민들의 비난을 십분감안하여 치열한 자기반성과 함께
정도경영, 투명경영, 민주경영을 가속화 해야 함은 물론이다.

경쟁력을 갖춘 기업, 생명이긴 기업, 세계일류기업이 되는 비결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종업원과 주주는 물론 국내외 고객으로 부터 진정으로 사랑받는
기업이 되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