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자 김성칠은 6.25때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겨가며 북한군 점령하의
서울에서 지냈다.

당시 그가 남긴 일기를 보면 그는 "아침 저녁으로 국기를 고쳐그려야
하는 신세"를 자조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통탄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데올로기와는 관계가 없는 학자임을 끝내 고집하고
있다.

반대로 프랑스의 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세계 제2차대전때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프랑스의 패배는 단지 프랑스군부의 책임일뿐
아니라 국민전체의 책임이라고 믿고 레지스탕스운동의 지도자로 나서
싸웠다.

결국 그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돼 1944년 총살됐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프랑스 만세"였다.

이 두 사학자의 경우는 처한 상황이 좀 다르지만 굳이 두사람을 예로
드는 까닭은 6.25때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 김성칠처럼 생각은 하면서도
블로크처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싸우다 죽어갔기 때문이다.

3년에 걸친 동족상잔의 결과 한국군을 포함한 UN군 18만여명이 생명을
잃었다.

민간인 사상자는 99만여명에 이른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구한말의 의병, 애국지사. 국립현충원의 현충탑비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지금 17만여명, 대전에도 14만여명의 영령이 모셔져 있다니
이들의 값진 희생이 오늘날 한국 번영의 초석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조국광복이 이루어진지 51년, 6.25가 이어난지 46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면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생정신이 점차
잊혀져 가고 있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해마다 현충일을 기념일로 켜가지만 전후세대들에게 이 날은 오직
공휴일일 뿐이다.

금년에도 현충원에서 기념식만 열리는가 했는데 올 해는 좀 색다른
행사가 민간주도로 열려 주목된다.

"비목마을 사람들"이란 동호인단체가 오늘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댐
부근에 있는 "비목의 계곡"에서 초연속에서 산화한 젊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비목문화제"를 연다는 소식이다.

6.25때 아군과 중공군의 격전지였던 "비목의 계곡"은 한명희 교수
(서울시립대.음악평론)가 66년 군복무를 하면서 가요 "비목"의 가사를
지은 곳이다.

총과 진혼나팔 대신 헌시 사물놀이패의 "비나리" "살풀이춤" "비목독창"
으로 짜여진 행사내용은 군번도 이름도 없이 산활한 젊은 영혼을 위로하는
뜻깊은 진혼제가 될것같다.

이 진혼제가 전후세대의 뜻깊은 현충일 행사도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