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을 가운데 두고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던 보채와 대옥이 정말
오랜만에 서로 마음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니 자매간처럼 친밀한 감정이
오고 갔다.

보채가 자기 처소로 돌아가면서 다시 한번 대옥에게 당부를 하였다.

"연와죽 쑤어 먹는 것 잊지 마"

"근데 언니, 사실은 연와를 구하는 게 문제야.

외할머님이나 외숙모님한테 부탁을 하면 구할 수도 있겠지만 약을
지어주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런 부탁을 한다는 게 영 염치가
없는 것 같애.

시녀나 할멈들에게 연와를 구해 오라고 하면 어디서 구해야 오겠지만
얼마나 속으로 내 욕을 하겠어.

친척집에 빌붙어 지내는 주제에 뭐 그리 구해달라고 하는 게 많고
식성이 까다롭느냐고 말이야"

연와라고 하는 것은 바다제비가 지어놓은 집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제비집을 가지고 죽을 쑤어 한동안 매일 아침 먹으려면 얼마나 많은
제비집을 헐어서 가지고 와야 한단 말인가.

아까 보채가 연와죽을 해 먹으라고 했을 때는 대옥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여겼다가 보채가 다시 강조를 하자 속마음을 털어놓은 셈이었다.

"그럼 우리집에 있는 연와 몇 냥을 갖다 줄게.

연와 한 냥에 얼음사탕 닷돈을 섞어 은냄비에다 죽을 쑤도록 해.

꼭 내 말대로 해봐, 위장이 좋아져 식욕이 생길 거야"

"어니, 너무 고마워. 그럼 밤에 갖다 줘. 밤에 와서 또 이야기를
나누고"

보채가 돌아가고 대옥은 침상에 누워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저녁 무렵부터 하늘이 흐려지면서 빗방울들이 듣기 시작했다.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창가 대나무들을 때리는 빗소리가 음울하게
들려왔다.

비가 와서 보채가 오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자 대옥은 그만 다시
처량한 심정이 되면서 우울해졌다.

대옥은 창가로 다가가 비바람에 흔들리는 음산한 대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그 대나무 숲은 생과 사 컴컴한 경계처럼 여겨졌다.

문득 "대별리"라는 시 제목이 시상과 함께 떠올랐다.

대별리는 "별리에 관하여"라는 뜻이었다.

가을꽃 애잔하고 가을풀 누렇게 시드는데
등불 밝힌 가을밤 길기도 하구나
창가에 가을이 가려면 아직도 멀었는가.

비바람 몰아쳐 이 마음 섧고야

대옥이 종이와 붓을 가져와 그 시상을 옮기고 있는데, 시녀가 들어와
보옥 도련님이 오셨다고 전하였다.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옥이 머리에 커다란 갓을 쓰고
몸에는 도롱이를 걸친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들어섰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