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오는 12일이면 창립 46주년이 된다.

한국은행 설립 46년은 우리나라 현대 경제사와 함께 한다.

태어난지 불과 2주일도 못되어 겪은 6.25와 전후 복구사업, 60~70년대의
경제발전, 80~90년대의 경제성장, 그리고 숨돌릴 사이 없이 밀어닥치는
개방의 물결.

한국은행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중심에 있을 것이다.

미국 연방은행 제도의 46년은 1959년에 해당한다.

이때 쯤에는 이미 연방준비 이사회의 의장은 재무장관에서 중앙은행 총재로
바뀐지 오래된 때이다.

정부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지고 독자적인 통화정책 수립의 터전이 마련된
때이다.

미증유의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오늘의
연방준비제도의 틀이 형성된 때였다.

46년은 어느모로 보나 성년의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은행을 둘러싼 일련의 사고는 성년으로서의 한국은행에
거는 우리의 믿음을 흔들었다.

믿음은 정보가 부족할 때에 뛰어넘어야 할 차원이다.

이 차원으로 들어가려면 한국은행은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 필요성은 이미 우리에게 닥쳐왔으며 이에 한국은행은 적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찌 한국은행 만을 탓할수 있으리요.

한국은행을 지배하는 정치-경제학적 환경이 중앙은행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데 장애요인이 되고 있음은 만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단적으로 한국은행의 46년 역사는 외부로부터 "형식상" 중심이었을
뿐이었다.

"실질적인" 중심을 언제 차지할 것인가.

이런 점에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역사를 쓴 윌리엄 그라이더의 "사원의
비밀"에 적힌 한 구절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돈은... 신비한 것이다. 신비한 것은 사회적 믿음을 위해서 필요하다.
사원(중앙은행)의 비밀을 보기 꺼린다면 그것은 진실을 대하기가 겁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중앙은행은 여러가지 단점과 불투명함에도 불구하고 사원을 제외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제도가운데 가장 믿을 수 있는 제도이다.

믿음은 신비한 것이며 그래서 독점적인 것이며 독자적인 것이다.

이 점이 중앙은행 필요성의 핵심이며 중앙은행 독립성의 요체이다.

이에 근거하여 중앙은행은 독점적이며 독립적이어야 한다.

이 주장은 한국은행법 제47조에도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다.

"화폐 발행권은 한국은행 만이 가진다"

이 조항의 참 뜻은 언제 실현될 것인가.

이 실현은 통화정책 선진화라는 시대적 요청의 측면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실현을 위하여 몇가지 제언이 필요하다.

첫째 통화정책 수단은 오로지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한국은행 만이 화폐발행권을 가진다"라는 화폐발행 독점규정은 화폐가치
안정의 독점적인 책임을 한국은행에만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화폐가치를 저해할 어떠한 요소도 막을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도
중앙은행에 부여해야 함을 뜻한다.

한국은행에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할 권한만 주고 화폐가치에 영향을
줄수 있는 행사력은 다른 부처에 주는 것은 제47조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의 예가 그동안 중앙은행의 재할인정책에 상당부분 전가되어온
중소기업지원 부담으로서 이것은 하루속히 재정으로 이관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가격결정에 있어서 여타의 간섭과 규제는 화폐가치 안정에
저해요인이 될 뿐이므로 이것을 시정하지 않고는 중앙은행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리라는 기대는 가질수 없다.

둘째 제47조의 정신을 올바르게 실현하는 통화정책의 관리대상은 시중
유동성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영역에 제2금융권의 모든 업무까지 포함
되어야 한다.

현재 통화관리대상인 총통화의 비중이 은행과 비은행 금융기관간 비대칭적
규제 때문에 80년대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현재 전체 유동성의 30%에
불과한 실정이다.

셋째 제47조의 정신을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통화관리 수단을 확보
해야 한다.

공개시장조작 방식을 유통시장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통화안정증권 발행을 최대한 억제하고 이를 대신하여 사용할 수 있는
국채는 여건이 불비하므로 금융채를 비롯한 우량 민간증권으로 확대할 것을
권고한다.

마지막으로 그라이더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중앙은행은 사원과 같은
것이다.

이 둘은 모두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사원의 사제처럼 중앙은행의
최고 의결기관 역시 믿음의 최후 보루가 되는 것이다.

신도 하나이고 돈도 하나이다.

사원도 하나이고 중앙은행도 하나이다.

신은 권위가 지켜져야 하고 돈은 가치가 지켜져야 한다.

한국은행 탄생의 연유는 이러하므로 그 창립 46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그의 본연의 임무를 위하여 건배하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