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8) 최영철 <케냐 사나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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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긴 머릿결"
아프리카 여성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흑인들의 머릿결은 천성적으로 꼬불꼬불해서 조금만 길어도 엉킨
실타래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헤어로션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빗질하기조차 힘들다.
이들이 머리를 땋기도 하고 예쁜 고무줄로 묶거나 길게 늘어뜨리기도
할수 있게 해준 이가 있다.
바로 아프리카에 처음으로 가발공장을 세워 이곳 여성들의 한을
풀어주고 동부 아프리카지역 시장을 석권한 케냐의 사나(SANA)사
최영철사장(42)이다.
"엔젤스"란 상표의 이 가발은 케냐를 거점으로 우간다 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잠비아 말라위 등 동아프리카 전역에 팔려나간다.
연간 매출액은 500만달러를 넘는다.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가발 원자재만도 연간 100만달러 이상이다.
7년전 그가 공장 사무실을 임대해 가발사업을 시작할 당시 최사장을
알았던 사람들은 의자는 커녕 연필 한자루 변변히 없는 사무실에서
아이디어 하나만 믿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최사장이 지금처럼 큰 회사의
주인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사장이 처음 케냐에 발을 디딘 건 지난 82년.
케냐에서 무역업을 하는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고나서다.
"최형, 케냐에 한번 놀러오지 않겠소.
들어올때 남대문에서 옷 한보따리 사고, 오는 길에 홍콩에 들러
전자제품을 가지고 오면 여행경비는 충분히 빠질거요"
국토의 대부분을 사바나지대가 차지하는 "야생동물의 왕국"이며
"동부아프리카의 관문" "적도가 지나는 나라" "인류의 발생지"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가진 관광지 케냐를 여행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것은
솔깃한 얘기였다.
다니던 직장을 잠시 휴직하고 선배의 귀띔대로 지참금을 대신할
물건들을 한보따리 메고 케냐땅을 밟았다.
며칠이 못되어 그의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가지고 온 물건들은 선배를 비롯한 몇몇 한국사람들에게 넘겨져
원가의 열배를 웃도는 이익금을 남기고 팔렸지만 정작 그는 원가에
해당하는 돈도 쥐어볼 수 없었다.
환상의 사파리 관광여행은 커녕 빈털터리 찬밥신세가 되어 9개월을
기다린 끝에 건진 것은 현금 300달러와 비행기표 한장이었다.
배신감과 씁쓸함을 안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케냐와 한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시작했다.
말이 좋아 무역업이지 한국에서 수출재고품 의류를 가져와 파는
보따리장사에 불과했다.
몇차례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다가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케냐
곳곳을 돌며 면밀히 시장조사에 나섰다.
그래서 찾아낸 사업이 바로 가발업.
아프리카 여인들의 공통적인 소망을 읽어낸 것이다.
가발업의 가능성을 확신한 그는 지난 89년 동아프리카 최초의 가발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그는 케냐의 언어 풍습 제도 법률
기업관행의 차이와 극심한 자금난으로 몇차례의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자재 살 돈이 없어 비행기로 원사 몇 박스를 수입해서 가발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검정색 원사를 잔뜩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검은색이 아닌 갈색을 좋아하더라구요.
검정색 원사는 창고에 쌓아둔 채 다시 갈색원사를 들여오기 위해 돈을
구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또 당시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던 일본업체와 어렵게 계약을 맺어 수입한
원사가 몸바사항에서 나이로비로 운반되던 중 없어져버린 일도 있었다.
"저로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만한 능력이 없었죠"
지난해 4월 또다시 원사 도난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사귄 여러 인사들의 도움으로 원사가 다른 가발업체에 숨겨져
있다는 걸 알게된 것이다.
그는 직접 현지 경찰과 함께 찾아가 지난번 피해액까지 보상을 받아냈다.
사업초기부터 그의 일 욕심은 대단했다.
"공장에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공장에서 먹고 자며 주문전화받기 상품포장 배달및 제품관리등 모든
능력과 시간을 일에 집중했다.
또 일꾼들과 침식을 같이하며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자 피부에 대한
피해의식이 유난히 강한 그들도 믿고 따라줬다.
2~3년 동안은 같은 한국인조차 잘 만나지 않을 정도였다.
언제나 아침 7시면 어김없이 공장에서 그를 볼 수 있다.
요즘도 밤새워 드라이박스의 온도를 테스트하고 작업공정 개선을
연구하며 생산된 모든 제품은 출하전에 일일이 확인한다.
가발제조의 문외한이던 그는 이제 전문가를 뛰어넘는 노하우를 쌓게
됐다.
지난 92년말에는 케냐실링의 평가절하를 예상하여 공장부지를 매입하고
자체 공장을 건축했다.
그가 직접 현장을 관리 감독하여 6개월만에 대지 1에이커 건평 1에이커의
공장을 완공한 것이다.
현지 사람들은 그 짧은 기간동안 이정도 규모의 건물을 지은 데 대해
혀를 내두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공장은 이제 사나사의 굳건한 경제적 기반이 됐다.
"기초공사 도중에 일본인 건축업자들이 평가절하에 따른 손해가 예상되자
건축비 인상을 요구하다 결국 철수했습니다.
시장에서 망치 10개, 삽 2개, 톱 1개를 사들고 왔지요.
동생과 둘이서 막일꾼을 불러 밤낮으로 물어가며 일을 했습니다"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나자 강도가 들기도 했다.
자동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6명의 괴한들이 출근하는 그를 위협하며
금품을 요구한 것.
금고 겉문만 열어보이며 돈이 없다고 하자 차에 태워 납치해갔다.
다행히 동생 최영문씨가 뒤따라오자 중간에 내려주고 도망쳤지만
현지 경찰은 신고를 받고도 자기들은 무장을 하지 않아 도와줄 수
없다고 하는 등 무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 줬다.
93년들어 그는 고가의 일본산 원사를 수입하는 대신 한국산 원사
(PP Fiber) 와 같은 종류의 원사를 직접 생산하기로 하고 기계를 도입,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가발용 원사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장 확대효과를 수반하여 사나사는 동아프리카의 명실상부한
주도기업으로 자리잡게 됐다.
그가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가발 원부자재 및 원사용 폴리프로필렌,
폴리에틸렌의 양은 매년 늘어나고 있으며 93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로부터
수출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95년 3월에는 원사기계 3,4호기를 한국으로부터 추가 구입했다.
또 그가 새로 설립한 가방제조업체 크로바는 원부자재를 한국에서
수입하고 인력은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국내업체들의 수출증대에
한몫하고 있다.
최사장은 성실한 사업방식과 정확한 투자로 여러 현지 사업가들로부터
공동 투자제의를 받고 있다.
이와 함께 공단지역 치안 유지에 물심양면으로 기여, 현지 기업가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그는 현재 가발공장 300명과 가방공장 200여명을 고용, 실업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케냐 경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업종 다양화를 위해 가발 원사 가방 등으로 세분화한 경영방식을
취하고 있다.
최사장은 "케냐에서의 제조업에는 선배도 후배도 없다"고 한다.
그의 7년동안의 고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배우고 연구하고 직원들을 훈련시키고 고품질의 제품을 내놓지 않으면
누구나 낙오된다는 것이다.
"케냐에는 돈벌 기회가 많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아이템은 무궁무진하지요.
그러나 이곳 사정에 어두워서는 성공하기 힘듭니다"
시장이 좁아 대기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점 등 현지 사정을 잘 파악하는
것이 투자성공의 열쇠라고 강조하며 누구든지 조언을 부탁하면 도움이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재케냐 한인상공인연합회 감사로 현지 기업의 발전과 결속에
힘쓰고 있다.
또 한인회 회장을 맡아 교민들간의 화합에도 열심이다.
작년에 그는 둘째 아들을 이곳에서 얻었다.
이제 아프리카는 사업의 대상만이 아닌 아들의 고향이 됐다.
그는 제2의 고향인 케냐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더욱 노력할 생각이다.
케냐 사나사의 최영철사장.
그는 사바나 저편에 우뚝선 킬리만자로산의 표범처럼 높은 기상으로
아프리카 들판을 누비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0일자).
아프리카 여성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흑인들의 머릿결은 천성적으로 꼬불꼬불해서 조금만 길어도 엉킨
실타래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헤어로션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빗질하기조차 힘들다.
이들이 머리를 땋기도 하고 예쁜 고무줄로 묶거나 길게 늘어뜨리기도
할수 있게 해준 이가 있다.
바로 아프리카에 처음으로 가발공장을 세워 이곳 여성들의 한을
풀어주고 동부 아프리카지역 시장을 석권한 케냐의 사나(SANA)사
최영철사장(42)이다.
"엔젤스"란 상표의 이 가발은 케냐를 거점으로 우간다 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잠비아 말라위 등 동아프리카 전역에 팔려나간다.
연간 매출액은 500만달러를 넘는다.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가발 원자재만도 연간 100만달러 이상이다.
7년전 그가 공장 사무실을 임대해 가발사업을 시작할 당시 최사장을
알았던 사람들은 의자는 커녕 연필 한자루 변변히 없는 사무실에서
아이디어 하나만 믿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최사장이 지금처럼 큰 회사의
주인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사장이 처음 케냐에 발을 디딘 건 지난 82년.
케냐에서 무역업을 하는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고나서다.
"최형, 케냐에 한번 놀러오지 않겠소.
들어올때 남대문에서 옷 한보따리 사고, 오는 길에 홍콩에 들러
전자제품을 가지고 오면 여행경비는 충분히 빠질거요"
국토의 대부분을 사바나지대가 차지하는 "야생동물의 왕국"이며
"동부아프리카의 관문" "적도가 지나는 나라" "인류의 발생지"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가진 관광지 케냐를 여행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것은
솔깃한 얘기였다.
다니던 직장을 잠시 휴직하고 선배의 귀띔대로 지참금을 대신할
물건들을 한보따리 메고 케냐땅을 밟았다.
며칠이 못되어 그의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가지고 온 물건들은 선배를 비롯한 몇몇 한국사람들에게 넘겨져
원가의 열배를 웃도는 이익금을 남기고 팔렸지만 정작 그는 원가에
해당하는 돈도 쥐어볼 수 없었다.
환상의 사파리 관광여행은 커녕 빈털터리 찬밥신세가 되어 9개월을
기다린 끝에 건진 것은 현금 300달러와 비행기표 한장이었다.
배신감과 씁쓸함을 안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케냐와 한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시작했다.
말이 좋아 무역업이지 한국에서 수출재고품 의류를 가져와 파는
보따리장사에 불과했다.
몇차례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다가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케냐
곳곳을 돌며 면밀히 시장조사에 나섰다.
그래서 찾아낸 사업이 바로 가발업.
아프리카 여인들의 공통적인 소망을 읽어낸 것이다.
가발업의 가능성을 확신한 그는 지난 89년 동아프리카 최초의 가발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그는 케냐의 언어 풍습 제도 법률
기업관행의 차이와 극심한 자금난으로 몇차례의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자재 살 돈이 없어 비행기로 원사 몇 박스를 수입해서 가발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검정색 원사를 잔뜩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검은색이 아닌 갈색을 좋아하더라구요.
검정색 원사는 창고에 쌓아둔 채 다시 갈색원사를 들여오기 위해 돈을
구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또 당시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던 일본업체와 어렵게 계약을 맺어 수입한
원사가 몸바사항에서 나이로비로 운반되던 중 없어져버린 일도 있었다.
"저로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만한 능력이 없었죠"
지난해 4월 또다시 원사 도난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사귄 여러 인사들의 도움으로 원사가 다른 가발업체에 숨겨져
있다는 걸 알게된 것이다.
그는 직접 현지 경찰과 함께 찾아가 지난번 피해액까지 보상을 받아냈다.
사업초기부터 그의 일 욕심은 대단했다.
"공장에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공장에서 먹고 자며 주문전화받기 상품포장 배달및 제품관리등 모든
능력과 시간을 일에 집중했다.
또 일꾼들과 침식을 같이하며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자 피부에 대한
피해의식이 유난히 강한 그들도 믿고 따라줬다.
2~3년 동안은 같은 한국인조차 잘 만나지 않을 정도였다.
언제나 아침 7시면 어김없이 공장에서 그를 볼 수 있다.
요즘도 밤새워 드라이박스의 온도를 테스트하고 작업공정 개선을
연구하며 생산된 모든 제품은 출하전에 일일이 확인한다.
가발제조의 문외한이던 그는 이제 전문가를 뛰어넘는 노하우를 쌓게
됐다.
지난 92년말에는 케냐실링의 평가절하를 예상하여 공장부지를 매입하고
자체 공장을 건축했다.
그가 직접 현장을 관리 감독하여 6개월만에 대지 1에이커 건평 1에이커의
공장을 완공한 것이다.
현지 사람들은 그 짧은 기간동안 이정도 규모의 건물을 지은 데 대해
혀를 내두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공장은 이제 사나사의 굳건한 경제적 기반이 됐다.
"기초공사 도중에 일본인 건축업자들이 평가절하에 따른 손해가 예상되자
건축비 인상을 요구하다 결국 철수했습니다.
시장에서 망치 10개, 삽 2개, 톱 1개를 사들고 왔지요.
동생과 둘이서 막일꾼을 불러 밤낮으로 물어가며 일을 했습니다"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나자 강도가 들기도 했다.
자동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6명의 괴한들이 출근하는 그를 위협하며
금품을 요구한 것.
금고 겉문만 열어보이며 돈이 없다고 하자 차에 태워 납치해갔다.
다행히 동생 최영문씨가 뒤따라오자 중간에 내려주고 도망쳤지만
현지 경찰은 신고를 받고도 자기들은 무장을 하지 않아 도와줄 수
없다고 하는 등 무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 줬다.
93년들어 그는 고가의 일본산 원사를 수입하는 대신 한국산 원사
(PP Fiber) 와 같은 종류의 원사를 직접 생산하기로 하고 기계를 도입,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가발용 원사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장 확대효과를 수반하여 사나사는 동아프리카의 명실상부한
주도기업으로 자리잡게 됐다.
그가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가발 원부자재 및 원사용 폴리프로필렌,
폴리에틸렌의 양은 매년 늘어나고 있으며 93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로부터
수출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95년 3월에는 원사기계 3,4호기를 한국으로부터 추가 구입했다.
또 그가 새로 설립한 가방제조업체 크로바는 원부자재를 한국에서
수입하고 인력은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국내업체들의 수출증대에
한몫하고 있다.
최사장은 성실한 사업방식과 정확한 투자로 여러 현지 사업가들로부터
공동 투자제의를 받고 있다.
이와 함께 공단지역 치안 유지에 물심양면으로 기여, 현지 기업가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그는 현재 가발공장 300명과 가방공장 200여명을 고용, 실업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케냐 경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업종 다양화를 위해 가발 원사 가방 등으로 세분화한 경영방식을
취하고 있다.
최사장은 "케냐에서의 제조업에는 선배도 후배도 없다"고 한다.
그의 7년동안의 고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배우고 연구하고 직원들을 훈련시키고 고품질의 제품을 내놓지 않으면
누구나 낙오된다는 것이다.
"케냐에는 돈벌 기회가 많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아이템은 무궁무진하지요.
그러나 이곳 사정에 어두워서는 성공하기 힘듭니다"
시장이 좁아 대기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점 등 현지 사정을 잘 파악하는
것이 투자성공의 열쇠라고 강조하며 누구든지 조언을 부탁하면 도움이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재케냐 한인상공인연합회 감사로 현지 기업의 발전과 결속에
힘쓰고 있다.
또 한인회 회장을 맡아 교민들간의 화합에도 열심이다.
작년에 그는 둘째 아들을 이곳에서 얻었다.
이제 아프리카는 사업의 대상만이 아닌 아들의 고향이 됐다.
그는 제2의 고향인 케냐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더욱 노력할 생각이다.
케냐 사나사의 최영철사장.
그는 사바나 저편에 우뚝선 킬리만자로산의 표범처럼 높은 기상으로
아프리카 들판을 누비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