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봉은 시어머니 형부인의 부름을 받아 형부인의 처소로 가면서,
이른 아침부터 웬일일까,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희봉이 수레를 타고 도착하자 형부인은 방안에 있던 사람들을 다
물러가도록 하였다.

"어머님, 무슨 일이에요?"

희봉은 우선 형부인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리 어두운 표정이 아닌 것으로 보아 집안에 불길한 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얘야, 이리 바투 다가오너라"

형부인은 손짓으로 희봉을 가까이 오도록 하여 방밖에 있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속삭이듯이 말했다.

형부인의 목소리가 작고 낮아 희봉은 잔뜩 고개를 기울여 귀를
곤두세워야만 하였다.

"너에게 의논할 일이 있어 이렇게 불렀다.

네 시아버님이 글쎄 나보고 첩을 하나 더 얻어달라는 거야"

"아버님에게는 벌써 첩이 세명이나 있잖아요"

희봉은 시아버지 가사의 나이를 생각하며 기가 차다는 기색을 떠올렸다.

"그러게 말이야,네 아버님도 주책이지. 근데 나에게 간절히 부탁을
하니 어떡하니? 또 구해주는 수밖에"

"도대체 누구를 첩으로 삼겠다는 거예요?"

"그게 말이다, 문제라니까. 시어머님이 아끼시는 원앙이라는 애를
첩으로 삼게 해달라는 거야.

하필이면 그 애를 첩으로 삼겠다는 건지 나만 곤란하게 되었다니까.

그래서 너를 부른 거야"

형부인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할머님이 얼마나 원앙을 생각하시는데요.

진지를 잡수실 때도 꼭 원앙이 차려주는 밥상만 받으시는 걸요.

그런 애를 할머님이 아들이 원한다고 해서 첩으로 내어주시겠어요?

게다가 할머님은 아버님이 첩을 셋이나 데리고 있는 것도 못 마땅하게
여기시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냐? 결국 내가 시어머님께 말슴을 드려야 되는데
내가 부탁을 드리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지 않느냐.

남편이 첩을 더 이상 얻지 않도록 간수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첩을
얻어주려고 나서느냐고 말이야"

"하긴 그래요.

어머님도 아버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해주시려고 하지 말고 이런 때는
좀 따끔하게 말씀을 드려요.

연세도 많으시고 자식과 손자들도 수두룩한데 또 첩을 얻어 뭐하실
거냐고요"

희봉이 형부인이 참 딱하다는 투로 의견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희봉 자신은 남편 가련을 첩질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꼭 붙들어놓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너도 네 시아버님 성질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한번 고집을 부리면
관운장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꺾지 못할 거야"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