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건설산업] '동남아서 황금기 맞는다'..어제/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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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의미에서 한국건설산업의 출발은 8.15해방부터다.
우리나라 첫 건설단체로 해방직후인 45년 10월 6일 조선토건협회가 설립
됐다.
이 단체는 당시 김세연(대창공영대표) 김재학(제헌국회의원)씨등 국내
건설계 원로들이 주축이 돼 결성됐을 뿐만아니라 대한건설협회등 지금의
각종 건설단체의 모체가 됐다.
일제강점기인 21년 조선토목건축협회가 만들어져 13년간 존속되긴 했지만
일본인 건설업자들이 주도했던 단체였다.
한국건설은 48년 대한토건협회, 51년 부산에서 한국건설협회 등이 결성되고
해방당시 170여개에 불과하던 건설업체가 소규모기업까지 포함, 3,000여개로
늘어나는등 여명기를 맞게 된다.
6.25전쟁이 끝난뒤 전후복구사업과 군납건설을 중심으로 발판을 다지기
시작한 건설업은 57년까지 여명기로 분류된다.
이때 미군공사의 입찰절차와 계약방식을 근거로 한 시공경험은 향후 우리
건설업체의 해외진출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건설업체의 무질서한 난립과 혼탁한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58년 건설업법이
제정되면서 한국건설은 정비기를 거치게 된다.
62년 3월 3차 건설업법개정을 통한 면허기준강화로 1,400여개의 건설업체가
542개로 정비된다.
3공화국의 출범으로 62년부터 시작된 국토개발사업을 골자로 하는 경제
개발계획으로 활력을 얻은 건설업은 2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이 마무리된
72년까지 질적 양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된다.
댐 도로 공단등 각종 사회간접자본건설로 경제개발을 주도하게 되고 이들
분야에서 건설기술의 향상을 가져 왔다.
이 기간은 한국건설의 도약기로 해외진출을 위한 힘을 비축한 시기이기도
하다.
60년대의 활발한 건설성장으로 형성된 값싸면서도 양질의 기술인력과 축적
된 시공 기술등을 바탕으로 70년대는 해외진출이 본격화되고 국내건설도
성장의 가속도가 붙게 된다.
73년~82년까지가 본격적인 성장기인 셈이다.
73년 사우디아라비아 도로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만들어진 건설특수로
"중동붐"을 맞은데 이어 국내건설은 해외로 잇달아 진출하게 된다.
특히 82년 중동경기퇴조때까지 이어지는 건설수출은 73년과 78년의 1,2차
석유파동의 파고를 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82년이후 중동경기퇴조로 건설수출이 계속 감소하면서 다시 건설업체들이
국내시장으로 돌아오고 기술개발과 사업구조조정에 치중하게 된다.
과당수주경쟁 부실파동 미분양등으로 건설환경이 전반적으로 악화되지만
88년 수도권신도시건설등 국내공사물량이 꾸준히 늘어나 성숙기를 맞게
된다.
또 90년대 들어서는 동남아를 중심으로 해외시장까지 되살아나 제2의
도약기를 맞고 있다.
< 김철수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1일자).
우리나라 첫 건설단체로 해방직후인 45년 10월 6일 조선토건협회가 설립
됐다.
이 단체는 당시 김세연(대창공영대표) 김재학(제헌국회의원)씨등 국내
건설계 원로들이 주축이 돼 결성됐을 뿐만아니라 대한건설협회등 지금의
각종 건설단체의 모체가 됐다.
일제강점기인 21년 조선토목건축협회가 만들어져 13년간 존속되긴 했지만
일본인 건설업자들이 주도했던 단체였다.
한국건설은 48년 대한토건협회, 51년 부산에서 한국건설협회 등이 결성되고
해방당시 170여개에 불과하던 건설업체가 소규모기업까지 포함, 3,000여개로
늘어나는등 여명기를 맞게 된다.
6.25전쟁이 끝난뒤 전후복구사업과 군납건설을 중심으로 발판을 다지기
시작한 건설업은 57년까지 여명기로 분류된다.
이때 미군공사의 입찰절차와 계약방식을 근거로 한 시공경험은 향후 우리
건설업체의 해외진출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건설업체의 무질서한 난립과 혼탁한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58년 건설업법이
제정되면서 한국건설은 정비기를 거치게 된다.
62년 3월 3차 건설업법개정을 통한 면허기준강화로 1,400여개의 건설업체가
542개로 정비된다.
3공화국의 출범으로 62년부터 시작된 국토개발사업을 골자로 하는 경제
개발계획으로 활력을 얻은 건설업은 2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이 마무리된
72년까지 질적 양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된다.
댐 도로 공단등 각종 사회간접자본건설로 경제개발을 주도하게 되고 이들
분야에서 건설기술의 향상을 가져 왔다.
이 기간은 한국건설의 도약기로 해외진출을 위한 힘을 비축한 시기이기도
하다.
60년대의 활발한 건설성장으로 형성된 값싸면서도 양질의 기술인력과 축적
된 시공 기술등을 바탕으로 70년대는 해외진출이 본격화되고 국내건설도
성장의 가속도가 붙게 된다.
73년~82년까지가 본격적인 성장기인 셈이다.
73년 사우디아라비아 도로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만들어진 건설특수로
"중동붐"을 맞은데 이어 국내건설은 해외로 잇달아 진출하게 된다.
특히 82년 중동경기퇴조때까지 이어지는 건설수출은 73년과 78년의 1,2차
석유파동의 파고를 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82년이후 중동경기퇴조로 건설수출이 계속 감소하면서 다시 건설업체들이
국내시장으로 돌아오고 기술개발과 사업구조조정에 치중하게 된다.
과당수주경쟁 부실파동 미분양등으로 건설환경이 전반적으로 악화되지만
88년 수도권신도시건설등 국내공사물량이 꾸준히 늘어나 성숙기를 맞게
된다.
또 90년대 들어서는 동남아를 중심으로 해외시장까지 되살아나 제2의
도약기를 맞고 있다.
< 김철수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