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운 < 동명정보대 석좌교수 / 전 한양대 대학원장 >

오늘의 상황은 적어도 100년의 척도에 그 의미가 부각된 것이다.

19세기 국민국가 체제를 갖춘 서양열강의 힘은 해외시장 확대를 위해
식민지획득에 적극 나섰다.

1858년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해산하고 인도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1861년에서 1865년까지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공업화와 농업중심주의의 알력이며 공업화를 추진한 북부의
승리로 끝나 미국 산업화사회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때를 맞추어 독일 프랑스등이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에 돌입했다.

지난 100년간은 세계적으로 무역을 확대하는 시기였고 서양은 자국의 이익
을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후진국은 그에 대항하기 위하여 안으로는
근대화 혁명, 밖으로는 반외세운동을 벌인 시기였다.

1868년 명치유신의 성공으로 국민국가가 된 일본은 근대화가 시작된다.

그후 불과 6년이 지난 1874년 대만에 출병, 식민지정책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국하며 부산 인천 원산이 개항
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한국땅에서 일본과
청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

청은 일본에 굴복하고 그 영향력은 조선에서 떠난다.

1896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조선에서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키로 하는
약정이 체결된다.

일본이 이토록 빨리 해외침략에 나설수 있었던 것은 국민국가 형성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서로 필리핀과 조선을 나누어 갖기로 약정한다.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청)에 둘러싸인 조선은 식탁위에 놓인 고기덩어리의
처지였다.

그간 조선은 안동김씨 등의 세도정치, 대원군과 민비의 알력으로 허송세월
을 보냈다.

여기까지의 구도는 요즘 4자회담이니 5자회담이니 하는 현재 한국을 중심
으로 한 국제상황과 비슷하다.

국토는 두개로 양단되어 북한은 조선왕조와 다름없는 가문국가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남한에는 안동김씨 세도정치 대신 일정지역의 권력이 36년간이나 이어져
왔다.

국민국가는 지역 가문을 초월해서 사회간접자본 취업의 기회 등을 균등화
하는데 있다.

미국과 같은 다인종으로 구성된 나라도 흑인등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입학
이나 취직등에 인원 할당이 있을 정도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현재 한국 대기업의 임직원중 약 40%가 영남출신이라고
한다.

북한이 50년 가문국가를 지속했다면 남한은 5.16이후 실질적인 지역주의가
판을 쳤다.

앞으로 100년 후인 21세기 말 우리 후손들은 오늘의 한국 실정을 어떻게
평가할까.

1914년 파나마운하 개통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로 말미암아 1869년에 개통된 수에즈운하에 이어지며 대서양과 태평양은
하나의 경제권을 형성하고 무역은 세계규모로 진행된 것이다.

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에 대한 공산주의 그리고 세계시장의 단일화라는
변증법적인 정.반.합의 마지막 단계임을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선언한다.

19세기말 국민국가 형성에 실패한 나라는 좌절했다.

1세기뒤 이 흐름은 국제화로 바뀌고 이추세에 대한 적응성 여부가 민족
국가의 장래를 결정한다.

국제화는 자국의 국경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소련이 15개, 유고는 6개로 분열되는 등 국경의 수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음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각 민족국가는 국제화 정보화의 흐름을 최대로 이용하여 자국의 이익추구에
혈안이 돼 있다.

건전한 국민(민족)의 일체감 없이 국제화에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0년전 한국좌절의 원인이 된 국민국가 형성의 과제는 오늘날 한국인
에게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