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기업을 만드는 노사] (17) 서울엔지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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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운영처럼 재미있는 것이 없어요.
기업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어있거든요"
치열한 경쟁에 부대끼는 우리 산업현장에서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할테지만 서울엔지니어링의 오세철 사장은 이런 자세로 하루하루를
현업에 임하고 있다.
오사장이 이렇게 말하는데는 짧지 않은 곡절이 숨어 있다.
서울엔지니어링은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의 오사장이 8년간 모중소기업에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지난 68년 창업한 회사다.
비철금속주조품을 생산하는 이회사는 창업이후 줄곧 성장가도를 달렸다.
그러다 공장확장을 위해 77년 7억원의 정부자금을 지원받아 인천
수출공단에 새공장을 차렸다.
납품관계에 있던 대기업이 설비확장을 촉구한데다 회사발전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됐다.
79년부터 대통령시해사건등으로 정국이 급변하면서 경기가 꽁꽁
얼어붙는 장기침체가 지속됐다.
당시 인플레로 부채는 1년이 지나면 곱이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84년 27억원의 부도를 냈다.
회사를 끝까지 지킨 오사장은 사태를 겨우 수습하고 86년 법정관리를
받아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다.
이러한 혼란을 겪으면서 절반이 넘는 종업원이 회사를 떠났다.
노동대격변을 가져온 87년 이회사에도 노조가 설립됐다.
법정관리기업과 노동운동의 화약고가 터진 87년의 노조설립.
이 두가지는 어느모로도 회사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서울엔지니어링은 이때부터 성장의 계기를 잡는 전화위복의
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노조가 설립된 87년의 첫 임금협상 당시 회사는 노조의 임금인상요구를
과감히 수용한 대신 노조는 당초 요구했던 근로복지개선사항들을 철회,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노조설립때부터 지금까지 위원장을 지내고 있는 안경봉 위원장은
"당시 경영진들이 노조와 대화를 기피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한 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회상한다.
첫단추를 잘 끼운 이회사의 노사관계는 이후부터 순항을 계속,
지금까지 생산차질을 한번도 빚지 않는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규근로후 이어지는 작업이다.
평일 2시간, 토요일 3시간씩 이어지는 잔업은 창업이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노조측도 간부회의시간중 생산성향상과 불량률감소방안에 대해 시간의
절반이상을 투자해 토론하고 결론이 나오면 현장에 도입하는 등 거창한
구호보다 현장에 스며드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매달 2백건씩 쏟아지는 현장개선 제안과 공장환경개선, 경영실적
공개제도 등도 노사가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장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매년 30여명씩 해외선진공장을 연수시키고 있는 회사측의 배려도
"노사는 회사발전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오세철 사장은 "회사는 이익을 내고 근로자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철학을 실천해온 결과 오늘에 이르렀다"다는 생각을 경영자는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울엔지니어링은 묘하게도 노조설립 1년뒤로부터 59억원의 매출액을
기록, 10년만에 5배가 늘었다.
특히 세계 유수기업인 특히드, 벨헬리콤터, 만사 등과 부품공장
계약을 맺는 등 세계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다.
내년이면 법정관리의 긴터널에서 벗어나게 되는 서울엔지니어링,
빚을 청산하고 사회규모가 커지면 소유주식을 모두 사회에 내놓을
생각이라는 오사장은 요즘 경영이 날마다 즐거울수 밖에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4일자).
기업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어있거든요"
치열한 경쟁에 부대끼는 우리 산업현장에서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할테지만 서울엔지니어링의 오세철 사장은 이런 자세로 하루하루를
현업에 임하고 있다.
오사장이 이렇게 말하는데는 짧지 않은 곡절이 숨어 있다.
서울엔지니어링은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의 오사장이 8년간 모중소기업에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지난 68년 창업한 회사다.
비철금속주조품을 생산하는 이회사는 창업이후 줄곧 성장가도를 달렸다.
그러다 공장확장을 위해 77년 7억원의 정부자금을 지원받아 인천
수출공단에 새공장을 차렸다.
납품관계에 있던 대기업이 설비확장을 촉구한데다 회사발전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됐다.
79년부터 대통령시해사건등으로 정국이 급변하면서 경기가 꽁꽁
얼어붙는 장기침체가 지속됐다.
당시 인플레로 부채는 1년이 지나면 곱이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84년 27억원의 부도를 냈다.
회사를 끝까지 지킨 오사장은 사태를 겨우 수습하고 86년 법정관리를
받아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다.
이러한 혼란을 겪으면서 절반이 넘는 종업원이 회사를 떠났다.
노동대격변을 가져온 87년 이회사에도 노조가 설립됐다.
법정관리기업과 노동운동의 화약고가 터진 87년의 노조설립.
이 두가지는 어느모로도 회사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서울엔지니어링은 이때부터 성장의 계기를 잡는 전화위복의
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노조가 설립된 87년의 첫 임금협상 당시 회사는 노조의 임금인상요구를
과감히 수용한 대신 노조는 당초 요구했던 근로복지개선사항들을 철회,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노조설립때부터 지금까지 위원장을 지내고 있는 안경봉 위원장은
"당시 경영진들이 노조와 대화를 기피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한 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회상한다.
첫단추를 잘 끼운 이회사의 노사관계는 이후부터 순항을 계속,
지금까지 생산차질을 한번도 빚지 않는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규근로후 이어지는 작업이다.
평일 2시간, 토요일 3시간씩 이어지는 잔업은 창업이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노조측도 간부회의시간중 생산성향상과 불량률감소방안에 대해 시간의
절반이상을 투자해 토론하고 결론이 나오면 현장에 도입하는 등 거창한
구호보다 현장에 스며드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매달 2백건씩 쏟아지는 현장개선 제안과 공장환경개선, 경영실적
공개제도 등도 노사가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장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매년 30여명씩 해외선진공장을 연수시키고 있는 회사측의 배려도
"노사는 회사발전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오세철 사장은 "회사는 이익을 내고 근로자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철학을 실천해온 결과 오늘에 이르렀다"다는 생각을 경영자는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울엔지니어링은 묘하게도 노조설립 1년뒤로부터 59억원의 매출액을
기록, 10년만에 5배가 늘었다.
특히 세계 유수기업인 특히드, 벨헬리콤터, 만사 등과 부품공장
계약을 맺는 등 세계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다.
내년이면 법정관리의 긴터널에서 벗어나게 되는 서울엔지니어링,
빚을 청산하고 사회규모가 커지면 소유주식을 모두 사회에 내놓을
생각이라는 오사장은 요즘 경영이 날마다 즐거울수 밖에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