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골치아프지만 내년이 더 문제다"

반도체 업계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반도체 값이 수직 하락하고 있는 요즘도 "죽을 맛"이지만 정작 내년
이후가 더 걱정된다는 얘기다.

바로 엄청난 규모로 공장을 짓고 있는 대만 반도체 업계 때문이다.

대만의 공장들이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쏟아낼 시기는 내년 상반기.

지금보다 배 이상 많은 8인치 웨이퍼 기준 월 21만장 가공 규모의 공장이
새로 가동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대만 한 나라만해도 기존의 월 15만5천장 생산규모를 합해
삼성전자 현대전자 LG반도체 등 국내 3사의 생산량 합계(8인치 웨이퍼
월 25만장 가공)를 훨씬 웃돌게 된다.

따라서 지금도 시장에서 남아도는 반도체가 이때 부터는 아예 넘쳐흐르게
될 지 모른다는 것.

이 경우 반도체 값이 지금보다 더 떨어질 것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생산원가 보다 훨씬 밑으로 판매하는 최악의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게 업계의 우려다.

"대만업체들이 예정대로 물건을 생산할 경우 반도체 값은 지금의
절반이하로 떨어질 것"(삼성전자 K이사)이라는 게 업계의 예상이다.

16메가D램 값이 지금의 16달러 안팎에서 내년 상반기에는 6달러에서
8달러선까지 주저앉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작년말 가격(개당 50달러)을 기준으로 하면 8분의 1을 밑도는 수준이다.

이 값이라면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 없다는 점에서 업계는 "걱정이
태산"(현대전자 H이사)이다.

사실 대만 업체들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을 잇달아 발표한 지난해만
해도 한국 업체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기술적 격차가 커 별로 위협적인 존재가 안된다"(삼성전자 이윤우
반도체 총괄사장)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게다가 올해 초부터 반도체 값이 폭락함에 따라 대만의 반도체사업 진출
계획은 "공포탄"으로 그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한국 업계의 이런 "기대"는 점차 물거품이 되고 있다.

"공포탄"이 아니라 오히려 "핵폭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대만 기업들은 반도체 가격에 관계없이 투자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데다
첨단 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최대 반도체 제조업체인 TSMC사가 일본 후지쓰와 공동으로
64메가D램을 생산키로 한 게 대표적 예다.

자체 개발력도 무시못할 수준이다.

TSMC사는 이달초 세계에서 처음으로 회로선폭 0.35미크론(1미크론는
1백만분의 1m)의 S램을 개발했다.

한마디로 자본과 기술이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국내 업계는 대만의 신규참여에 대응할 마땅한 카드가 없다는 고민을
안고 있다.

사실 올초만 해도 업계 일각에선 선제 공격을 실시하자는 주장이
많았다.

대표적인 게 "걸프전론"이었다.

반도체 값을 일부러 더 떨어트려 대만업체로 하여금 시장 참여는 꿈도
못꾸게 하자는 것.단숨에 상대방을 제압해 속전속결로 끝내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걸프전이 아닌 월남전"(반도체 산업협회 김치락
부회장)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대만업체들이 상황이 어려워져도 거침없이 제 갈길을 가고 있어
장기전으로 치닫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일본 대만업체들간에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전쟁은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에 따라 승부가 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물론 대만업체들이 새로 시장에 참여한다고 해도 승산은 한국이나
일본쪽에 더 있는 게 사실이다.

대만업체들은 어쨌거나 후발주자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일업체에 비해 마케팅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그동안 주로 비메모리 제품을 생산했기 때문에 많은 물건을 판매해
본 경험이 없다는 약점도 갖고 있다.

하지만 대만의 신규 참여로 한일업계는 큰 곤욕을 치를 게 틀림없다.

당장 겪게될 반도체 가격하락 외에도 자칫하면 "동맹군"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도 안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한국에 분명히 역전당했다"고 자인하고 있는
일본 기업들이 대만과 손잡고 한국 업계를 견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만 TSMC와 일본 후지쓰가 손잡고 64메가D램을 공동 생산하기로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심상치 않은 징후다.

어쨌든 국내 반도체 업계는 대만의 시장참여로 큰 전환점을 맞게 될 수
밖에 없다.

"내년에는 "세계 1위냐 2위냐"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이
전개될 것"(전자산업진흥회 이상원부회장)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내 업계가 배 두들기며 장사하던 구태를 벗고 신발끈을 다시 매야할
시점이다.

<조주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