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은 요즘 심사가 무척 괴롭다.

설마했던 미국이 자신의 연임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말을 안했을 뿐이지 내심 갈리총장의 연임을 반대해온
터였다.

특히 공화당이 갈리에 대해 더 회의적이었다.

유엔을 제대로 끌어가지 못할 뿐더러 유엔개혁에도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논평해 왔다.

무엇보다도 유엔평화유지군의 운영을 놓고 여러차례 갈리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갈리총장이 재선도전의사를 밝히자 클린턴행정부는
잽싸게 그의 연임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올 가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이 제기할 이슈 하나를 사전에 봉쇄해 버린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갈리총장은 미국선거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견해가 갈수록
힘을 얻어가고 있다.

그러나 갈리진영은 미국에 맞서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이 아프리카 출신의 갈리를 반대하는 것은 일종의 인종차별이라고
까지 선언하고 나섰다.

갈리총장 본인도 자신의 취임이후 유엔의 국제적인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졌고 국제 회의도 역대 어느 총장재임시 보다 활발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총장주변 한 인사는 <갈리총장이 미국으로 부터 괘씸죄에 걸려 있다>고
귀띔한다.

과거 총장들은 미국무성의 차관보급과 대화를 했으나 갈리총장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호락호락 미국에 놀아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미국은 유엔에 할당된 분담금을 내지 않고 있다.

유엔재정을 절대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미국이 분담금을 체납함으로써
유엔은 파산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올 가을 유엔 사무총장선출 때까지는 세계외교의 중심지 유엔빌딩이
한바탕 홍역을 치를 것 같다.

우선 표면적으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소르본느대학에서 유학한 갈리를
공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소련도 아직까지는 갈리 편이다.

중국은 서방세계의 후보에는 무조건 부표를 던지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영국과 독일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다.

지역적으로도 크게 갈려 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유엔이 서방위주로 운영되고 있다며 적지 않은 반발을
보이고 있다.

유엔사무총장은 상임이사국의 추천을 받아 총회에서 선출되는데 이렇듯
상임이사국간 지역간 갈등이 심화될 경우 총장부재라는 예기치 않은 상황도
충분히 예견할수 있는 일이다.

<세계평화구현>이라는 유엔이념이 총장선출을 계기로 <세계분열심화>라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 도쿄=박영배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