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의 첩이 되기 싫다고 오빠에게 분명하게 의사표시를 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앓고 있는 원앙이 너무도 안쓰러워 김문상은 가슴이 저며지는 것
같았다.

"알았다.

다른 일은 몰라도 네 혼사인데,어찌 네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로 억지로
보낼 수 있겠니?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아버님은 곧 돌아가실 것 같고 어머님도 얼마
있지 않아 아버님을 뒤따르실 듯하니, 네가 가사 대감의 첩이 되어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리는 날수가 지극히 짧겠구나.

싫어하는 사람의 첩이 되어 네가 마음고생을 해야 할 세월은 까마득히
긴데 말이다.

그러니 나도 더 이상 너를 강요하지 않으마.

부모님 일은 이 오빠에게 맡기고 너는 네 갈길을 가도록 하여라"
이렇게 말을 하고 보니 김문상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자 원앙이 더욱 흐느끼며 김문상의 품으로 아예 쓰러지다시피
하였다.

누가 바깥에서 훔쳐본다면 남녀가 애틋한 사연을 안고 정사라도 벌이는
것으로 여길 법하였다.

영국부로 올라온 김문상은 가사에게로 나아가 남경을 다녀온 일을
보고하면서 그렇게 어려운 집안 형편을 보고도 원앙의 마음이 바뀌지
않은 사실을 아뢰었다.

"무엇이라구?

네놈도 한통속이구나.

원앙이 그년의 마음을 바꾸어보겠다고 휴가까지 받아서 집을 다녀와
놓고는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해?

이놈, 휴가를 얻으려고 거짓말을 한 게로구나"

가사가 숨을 헐떡이며 고함을 질렀다.

"그게 아니구요, 저도 온갖 말로 원앙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원앙의 결심이 워낙 완고해서 도저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집안 형편을 보면 자연히 마음이 바뀔 줄 알았는데, 원앙은 오히려
부모님이 금방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혼사는 무슨 혼사냐면서 말을 듣지
않아요"

김문상은 자기 생각을 원앙의 생각인 것처럼 하여 변명하고 있었다.

가사가 두팔까지 휘저으며 언성을 높였다.

"좋다.

원앙이 그년에게 전하여라.옛

날에 상아라는 계집이 젊은 사내를 좋아해서 늙은 남편을 버리고
불사약을 훔쳐 달로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다만 그년이 꼭 상아처럼
젊은 놈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가련이나 보옥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다고
하여라.

내가 먼저 그년을 점찍은 것을 다 아는데 가련이나 보옥이 그년을 데리고
가려 하겠는냐.

아버지와 큰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리고 원앙이 다른 사내에게 시집을 간다해도 평생 내손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줄 알라고 전하여라.

그러니 일찌감치 마음을 돌리는 게 좋을 거야"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