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예절과 도리의 회복 .. 정복근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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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삶의 질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주 듣는다.
기왕이면 질좋은 일상용품들을 사용하고 싶듯 좀더 수준높은 생활을
영위하자는 주장들인 것같다.
이것도 결국 경제적으로 어떤 고비를 넘겼다는 우리사회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집단욕구이겠는데 정말 이제는 사는
일 자체를 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하지 않을까 자주 생각하게 된다.
좀더 넓은 아파트, 좀더 큰 차, 좀더 큰 TV와 국제상표의 옷이며 생활
도구들, 그리고 철따른 해외여행과 가족과의 잦은 외식같은 것들이 모두
그나름으로는 수준높은 삶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양질의 삶이라는 것이 과연 이런 정도로 확보될 것인가 생각하면 어쩐지
미흡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얼른 덧붙여 보게되는 것이 문화예술의 향유라는 조건이다.
국내작품의 공연무대는 꼭 그렇지도 않지만 세계적인 명장들의 전시회나
내한공연 무대들이 대개 매번 대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면 수준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하려는 대중의 욕구는 이미 돈벌이에 민감한 기업인들의
시선을 끌만큼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발길이 휘청거릴만큼 비싼 입장료를 내고 관람한 일년에
몇번 되지않는 문화행사가 과연 우리를 얼마나 뿌듯하게 할 것인지는
의심스럽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
언젠가 국내의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국민의식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행복인지도가 외국의 경우에 비해 비교적 낮은 것으로 파악
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국민의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으며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룬 성취감을 느끼고 있어 외형적으로는 충분히 행복할만한 조건을 갖춘
우리가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어떤 종류의 상실감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바쁘게 허둥지둥 살다가 문득 돌아보면 어딘가 허전하고 섭섭하며 지친듯
피곤하고, 다친 데가 없는 데고 몸인지 마음인지 한부분이 늘 애매하게
쓰라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한두사람의 개인적 경험만은 아닌 것같다.
곰곰히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기대할 권리가 있는 사람다운 대접,
사람이 사람에게 마땅히 베풀며 주고 받아야하는 따뜻하고 점잖은 배려와
예우를 서로 하지도 받지도 못한다는 실망과 자책 분노가 그 주원인은
아닐까하는 느낌도 든다.
가난을 벗고 잘 살기 위해서 허둥지둥 황급히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분명
어느 길목에선가 점잖음과 따뜻함 단정한 예법과 삼가함의 도리를 몽땅
잃어버리고 온 게 틀림없는 것같다.
예절은 때때로 사람과 사람사이를 지키는 장벽이 된다.
내남을 가리고 위아래를 가리고 분수를 알아 서로의 입장을 분명히 지키게
해서 너무 가까워서 무례하지 않고 너무 멀어 소원해지지 않게 하는 장벽이
된다.
예절을 잃어 입장을 지키지 못해서 우리가 회복하기 어려울만큼 파괴해
버린 것들의 목록을 생각해보면 상실감은 추상이 아닌 실체로 다가온다.
마주치는 모든 낯선 남자를 서슴없이 아저씨라 부르고 소녀티를 벗은 모든
여자를 허물없이 아줌마라 부르며 오빠라고 부르던 남자와 결혼해서 아빠
라고 부르며 사는 뒤숭숭한 주변의 관계들을 돌아보면 애써 예절을 찾고
도리를 챙기기에는 너무 친근하며 익숙해거 마침내 뒤엉켜 썩기 시작한
달착지근한 퇴폐의 냄새가 난다.
사과는 썩으면 발효해서 초라도 되지만 삼가함과 예절을 잃은 인간관계는
부패하면 서로에 대한 까닭없는 모멸과 함께 폭력과 타락의 악취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이런 악취를 떨치고 일어나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각자의 주변에 예절의 성벽을 쌓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품위있는 사람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삼가할 줄 알며 더도 덜도
없이 알맞게 배려할 줄 안다.
이런 도리와 예절을 되찾아 지니는 것이 결국 가장 손쉽게 해볼수 있는
정말 잘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30일자).
기왕이면 질좋은 일상용품들을 사용하고 싶듯 좀더 수준높은 생활을
영위하자는 주장들인 것같다.
이것도 결국 경제적으로 어떤 고비를 넘겼다는 우리사회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집단욕구이겠는데 정말 이제는 사는
일 자체를 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하지 않을까 자주 생각하게 된다.
좀더 넓은 아파트, 좀더 큰 차, 좀더 큰 TV와 국제상표의 옷이며 생활
도구들, 그리고 철따른 해외여행과 가족과의 잦은 외식같은 것들이 모두
그나름으로는 수준높은 삶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양질의 삶이라는 것이 과연 이런 정도로 확보될 것인가 생각하면 어쩐지
미흡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얼른 덧붙여 보게되는 것이 문화예술의 향유라는 조건이다.
국내작품의 공연무대는 꼭 그렇지도 않지만 세계적인 명장들의 전시회나
내한공연 무대들이 대개 매번 대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면 수준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하려는 대중의 욕구는 이미 돈벌이에 민감한 기업인들의
시선을 끌만큼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발길이 휘청거릴만큼 비싼 입장료를 내고 관람한 일년에
몇번 되지않는 문화행사가 과연 우리를 얼마나 뿌듯하게 할 것인지는
의심스럽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
언젠가 국내의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국민의식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행복인지도가 외국의 경우에 비해 비교적 낮은 것으로 파악
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국민의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으며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룬 성취감을 느끼고 있어 외형적으로는 충분히 행복할만한 조건을 갖춘
우리가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어떤 종류의 상실감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바쁘게 허둥지둥 살다가 문득 돌아보면 어딘가 허전하고 섭섭하며 지친듯
피곤하고, 다친 데가 없는 데고 몸인지 마음인지 한부분이 늘 애매하게
쓰라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한두사람의 개인적 경험만은 아닌 것같다.
곰곰히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기대할 권리가 있는 사람다운 대접,
사람이 사람에게 마땅히 베풀며 주고 받아야하는 따뜻하고 점잖은 배려와
예우를 서로 하지도 받지도 못한다는 실망과 자책 분노가 그 주원인은
아닐까하는 느낌도 든다.
가난을 벗고 잘 살기 위해서 허둥지둥 황급히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분명
어느 길목에선가 점잖음과 따뜻함 단정한 예법과 삼가함의 도리를 몽땅
잃어버리고 온 게 틀림없는 것같다.
예절은 때때로 사람과 사람사이를 지키는 장벽이 된다.
내남을 가리고 위아래를 가리고 분수를 알아 서로의 입장을 분명히 지키게
해서 너무 가까워서 무례하지 않고 너무 멀어 소원해지지 않게 하는 장벽이
된다.
예절을 잃어 입장을 지키지 못해서 우리가 회복하기 어려울만큼 파괴해
버린 것들의 목록을 생각해보면 상실감은 추상이 아닌 실체로 다가온다.
마주치는 모든 낯선 남자를 서슴없이 아저씨라 부르고 소녀티를 벗은 모든
여자를 허물없이 아줌마라 부르며 오빠라고 부르던 남자와 결혼해서 아빠
라고 부르며 사는 뒤숭숭한 주변의 관계들을 돌아보면 애써 예절을 찾고
도리를 챙기기에는 너무 친근하며 익숙해거 마침내 뒤엉켜 썩기 시작한
달착지근한 퇴폐의 냄새가 난다.
사과는 썩으면 발효해서 초라도 되지만 삼가함과 예절을 잃은 인간관계는
부패하면 서로에 대한 까닭없는 모멸과 함께 폭력과 타락의 악취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이런 악취를 떨치고 일어나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각자의 주변에 예절의 성벽을 쌓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품위있는 사람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삼가할 줄 알며 더도 덜도
없이 알맞게 배려할 줄 안다.
이런 도리와 예절을 되찾아 지니는 것이 결국 가장 손쉽게 해볼수 있는
정말 잘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