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 있는 이도 있고 비스듬하게 기대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

서서 왔다갔다 하면서 얘기하기도 한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특별하다.

"무인도씨, 그건 이렇지 않습니까" "눈물씨, 제 생각은 그게 아닌데요".

중앙개발이 최근 2급 이상 간부 2백46명을 대상으로 3박4일간 벌인 S.D.T.
(Self Discovery Trainning.자아발견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12명으로 구성된 소그룹은 아무런 제한 없이 회의를 진행한다.

세미나에 참여하는 순간 사회에서 통용되던 이름은 깡그리 부정된다.

대신 "무인도" "눈물" "호수" "송아지"등 자신의 인생을 상징할 수 있는
별명을 자유롭게 고른다.

핸드폰이나 삐삐 등 외부와의 연락수단은 모두 압수(?)된다.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이른바 형식파괴 세미나의 전형적인 예다.

기업조직내에서의 파괴바람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파괴바람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인사제도나 채용시스템등 등 하드웨어부문만이 아니라 회의나 근무스타일
등 소프트웨어부무문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

비단 회의 뿐만이 아니다.

기존 관행이나 고정 관념에 이르기까지 파괴의 바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휴먼 컴퓨터라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는 연구실내에 아예 수면실을
만들었다.

졸리면 차라리 자고 일하는 게 업무 효율을 위해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낮잠을 즐길 수 있다"(기획실 과장)는
것이다.

사무실 내에서 자는 것은 물론 조는 것도 용납되기 힘들었던 70년대식
"관리 마인드"로는 가히 혁명적인 인식의 "파괴"다.

의료기기업체인 메디슨은 회사근처에 생맥주집 네 곳을 정해 직원들이
먹는 술값을 회사가 내준다.

사원들간 비공식적인 대화를 장려하기 위한 것이다.

직원들끼리 모여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할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제일모직은 한달에 이틀식 "창조적 파괴의 날"을 정해 운영중이다.

이날 만큼은 출근후 회사일과 관계없이 아무일이나 할 수 있다.

밀린 리포트를 쓸 수도 있고 어학공부를 할 수도 있다.

"근무파괴"인 셈이다.

빙그레가 매월 넷째 토요일을 "관행 타파의 날"로 정한 것도 같은 이유다.

발상의 전환으로 창조적 아이디어를 끌어내기 위해서다.

이날은 각 부서별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서만 제출하면 일체
간섭 없이 자유시간을 보낼 수 있다.

최근 "관행 타파의 날"에는 농촌 봉사활동(경리부), 통일동산견학(연수부),
유도선수훈련체험(홍보실)등 각 부서별 이색 체험시간을 가졌다.

이같은 파괴바람엔 대그룹 총수들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2월 LG그룹의 구본무 회장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그룹 스킬
경진대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번지 없는 주막"을 멋드러지게 불렀다.

회장과 말단사원들이 한데 어울려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그룹 회장하면 연상되는 권위주의 이미지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라, 창의성을 살려라,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기업사회에 불고 있는 "파괴" 바람의 진정한 의미다.

발상의 전환을 통한 창의성의 개발은 이제 기업의 생존조건으로까지 부상
하고 있는 느낌이다.

창의성이야말로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이다.

획일화돼 있는 기업 문화에서는 조직원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기대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조직원의 "창의적인" 아이디어 없이 조직이 발전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발전이란 곧 변화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정보와 지식 기술과 상품이 급속도로 변하는 때다.

이럴수록 뛰어난 아이디어나 상식을 넘는 신제품으로 "유행"을 이끄는
기업이 이익을 선점한다.

문제는 "스피드"와 "소프트"다.

그러나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이 필요하다.

파괴가 필요한 이유다.

< 이의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