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설을 이야기하다 보면 신라 말기의 고승이었던 도선을 빼놓을 수
없다.

불교적 지덕사상에 바탕을 둔 한민족 특유의 풍수설을 개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풍수설은 시대를 내려 오면서 끊이지 않고 한민족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왔다.

그 두드러진 첫번째 결실은 고려조의 개국에서 드러났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이 없으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태조는 수도의 위치가 동남방에 편재된 경주보다 중부지방이 낫다는
도선의 주장에 따라 수도를 송악 (개성)으로 정했는가 하면 "훈요십조"
에도 도선의 풍수설을 좇은 내용을 많이 담았다.

일설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1년(서기875)에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도선의 예언대로 태조가 송악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고려조 역대 왕들이 도선을 지극히 존경하고 그의
풍수설을 존중했다고 한다.

도선의 풍수설은 조선조 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태조가 무학대사를 시켜 남경 (서울)을 수도로 정한 것도 그 유산이었다.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삼각산명당기" 등의 저서가 전해져 도선을
한국 풍수설의 시조 내지는 대가로 꼽게 하고 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승려였다.

도선은 신라 흥덕왕 2년(827) 전라도 영암의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중이 되었다.

그뒤 유명한 사찰을 돌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문성왕 8년(846)
곡성 태안사의 혜철을 찾아가 선법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운봉산 태백산에서도 수도를 하고 광양 옥용사에서 수백명의 후학을
지도하다가 효공왕 2년(898)에 입적했다.

도선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그를 궁궐로 불러 법문을 들었고 효공왕은
그의 사후에 료공선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조에도 숙종은 대선사라는 칭호를 추증했고 인종은 선각국사로
추봉했다.

때마침 갈수록 심각해져 가는 묘지난을 해소하려는 대책이 논의되고
있는 마당에 한국 풍수설의 비조인 도선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선양하게 되었으니 정부의 이율배반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묘지난이 가중되어 온 것은 양택과 음택을 가려 조상의 묘를 모셔온
풍수설 신봉의 관습에 그 큰 원인의 일단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풍수설을 믿는 한국인이 72%나 된다는 조사결과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