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이 어렵다.

그러나 어려운 악조건속에서도 각 전문분야에서 꾸준한 기술개발과 남다른
장인정신으로 세계시장에 우뚝 서는 중소기업이 늘고 있다.

불굴의 의지와 끈기 하나로 사업을 시작, 중견업체로 성장하기까지 겪은
이들 업체의 애환및 성장전략을 심층취재, 시리즈로 게재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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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100원짜리 제품을 구입, 사용할때는 200~300원의 가치를 누릴수
있는 만족감을 줘야 한다"

세계최초로 전자식 뻐꾸기시계를 개발, 국내시장석권에 이어 활발한 해외
수출로 성가를 높여가고 있는 카이저산업 장현권사장(47)의 성공비결이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심리와 취향을
파악, 이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고 완벽한 제품이 될수 있도록 철저한
품질관리를 꾀한다는 것.

"시계가 내수시장위축으로 사양산업화돼가고 있다는 말도 들리지만 연구
개발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수 있다고 봅니다.
기술이 축적돼야 보다 콤팩트화할수 있고 이는 결국 다양한 디자인으로
연결되지요"

장사장은 "개성화 차별화시대에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패션감각과 다기능을
갖춘 제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신기술개발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카이저산업은 장사장의 이같은 경영철학아래 제2의 도약기를 맞고 있다.

73억원을 들여 지난 3월 완공된 인천남동공단 5,000여평부지에 건평
2,200평규모의 공장이 최근 본격 가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월 20만여대의 각종 벽시계를 생산할수 있는 자동화시설로 밀려드는 국내외
주문을 충분히 소화할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엔 러시아와 120만달러어치의 뻐꾸기.벽.탁상시계를 수출키로 하고
첫 선적을 끝냈는가 하면 미국시장에 대량수출을 타진중이다.

흔히 뻐꾸기시계의 메카로 불리는 독일과 스웨덴을 비롯 스페인 대만
브라질등 세계 13개국에 각종 벽시계를 "KAISER" 브랜드로 수출해온
카이저산업은 올해 수출을 지난해보다 약 70% 늘어난 400만달러로 잡고
있다.

고전과 현대감각을 두루 갖춘 다양한 제품이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주문량이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예상되는 매출액은 200억원이다.

"뻐꾸기황제" "시계박사" "시계업계의 신데렐라"로 불리는 장사장이 일궈낸
오늘의 카이저산업은 철저한 장인정신이 만들어낸 땀의 결정체라고 할수
있다.

장사장이 시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69년.충북괴산군증평읍에서 무작정
상경, 남대문시장에서 시계도매업을 하던 고향선배의 회사인 "광진상사"에
취직해 영업사원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70년에는 서울 서대문 독립문근처에 시계소매점인 "보성사"를
차렸고 76년엔 서울예지동골목에 시계도매점 "보성상사"를 병행해 경영했다.

도매영업사원시절엔 "소매상의 요구"를, 소매점을 경영할때는 "소비자의
요구"를 몸으로 익혔던 것이다.

당시에는 돈도 꽤 벌었다.

그러나 79년 2차오일쇼크로 전산업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국내시계시장에
위기가 닥쳤다.

범람하는 밀수품으로 품질과 가격에서 밀리는 국내시계가 발붙일 곳이
없게 돼버린 것이다.

"사업은 시작보다 마무리가 어렵다는 것을 이때 절감했습니다. 당시
날개돋친듯 팔리는 밀수시계의 유혹도 받았지만 양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장사장은 "이때 밀수품보다 더 좋은 제품을 직접 제작해야겠다고 결심
했다"고 회고한다.

생산제품은 벽시계와 탁상시계로 결정했다.

손목시계는 밀수품과 경쟁이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81년 서울이촌동 한강맨션의 방 한칸을 빌려 벽.탁상시계제작에 들어갔다.

하루에 50대를 만들어 소매점에 직접 들고 판매하러 다녔다.

이때 한 소매점에서 의뢰한 독일제 기계식 뻐꾸기시계의 수리를 맡아 분해
청소하면서 "이런 것을 대중화시키면 히트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하고 불량률없는 제품만으로는 시장우위에 설수 없고 뭔가 특징있는
상품을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기계식 뻐꾸기시계는 장기적으로 투자하기에는 너무 낡은 기술
이라고 판단, 전자식제품의 개발에 나섰다.

83년 카이저산업을 설립, 사재를 털어 마련한 1,500만원으로 신림동에
25평짜리 공장을 마련하고 종업원 5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개발자금이 모자라 시골의 논을 팔아 설비를 구입하고 날마다 밤을 새우며
수차례의 시행착오끝에 뻐꾸기시계가 탄생한 것은 88년9월.

시장에 나오자마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엄청난 주문이 들어 왔다.

당시 시중에 나와 있던 일본뻐꾸기시계는 반전자식이었다.

"일제시계가 좋다"는 인식을 바꾸는 신화를 이룩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의 세이코와 시티즌사에서 OEM방식수입을 제의해 왔고 마두만사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독점수입계약체결을 요구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5년여의 피땀흘린 끝에 만든 상품을 당당히 우리상표를 붙여 팔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후 6단계의 개발과정을 거쳐 완전독자기술로 IC카운터프로그램방식에
의해 자연원음에 가까운 뻐꾸기소리를 창출했고 빛의 밝기에 따라 소리및
작동이 멈추는 광센서스위치를 부착한 제품까지 내놓았다.

카이저산업은 이제 뻐꾸기시계뿐아니라 벽시계와 탁상시계에 관한한 세계
제일의 업체로 발돋움하고 있다.

최근 컬러풀한 인테리어클럭과 모던클럭등 다양한 신제품을 잇따라 내놓는
등 세계정복을 향한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있다.

장사장은 "그간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앞선 디자인, 앞선 기술의 제품"
을 계속 개발해 나갈 것"이라면서 "카이저가 있는한 시계시장의 수요는
확대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 신재섭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