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문막읍내 문막공단에 자리잡고 있는 이수세라믹.

지난 87년에 설립된 이회사는 세라믹을 소재로한 페라이트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창립이후 기술불안정으로 적자가 누적되기도 했으나 지난 94년 흑자로
반전한 이후 올해 5백억원의 매출을 예상하는등 조금씩 성장의 폭을
키워가고 있다.

설립초기 이회사의 노사관계는 한때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설립초기부터 93년까지 3백여억원의 누적적자가 이어졌다.

근로자의 임금도 자연히 동결되거나 최소한의 인상수준에 그쳐
불만요인이 됐다.

그사이 이직 근로자가 급증하고 작업장에는 근로자들의 나태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93년 설립된 노조와 회사는 94년 임금협상에서
타협안 도출에 실패해 공장가동이 중단되는 위기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정규문 노조위원장은 "생산의욕을 일으킬만한 요인이 없어 솔직히
나부터 근로자세가 나태할 정도로 공장전체가 해보자는 분위기 형성이
전혀 안됐다"고 당시 상황을 전한다.

심각한 위기를 느낀 이수세라믹의 경영진은 94년 경기도 용인에 있는
연수원에서 회사설립후 처음으로 전직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를
만들었다.

"희망 94 특별교육"이란 이름으로 열린 4일동안의 교육에서 이대로
주저 앉을 수 없다는 경영진의 호소에 근로자들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는
계기가 마련됐다.

경영진의 변화노력을 감지한 노조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조는 곧이어 야유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정위원장의 주창으로 품질
향상에 전력을 기울여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근로자가 앞장설 것을
결의했다.

노조측은 곧이어 생산량 월 5백t달성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제작,
공장 정문에 붙여놓고 근로자들의 의식변화를 선도했다.

생산품목인 페라이트는 무엇보다 꼼꼼한 작업정신에서 우수한 품질이
나오기 때문에 노조의 운동방향은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4백60t에 불과했던 월간 생산량이 연말에 4백80t으로 향상됐다.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는 비율인 수율도 85%선에서 95%선까지 높아졌다.

그 결과 94년엔 2백6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가운데 2억원의 흑자가
처음으로 발생했다.

전망없는 회사라고 이직을 고려하던 근로자들도 처음으로 연말 상여금을
지급받고는 점차 애착을 가지기 시작했다.

홍민기 공장장은 "92년 부임당시 공장내부에 먼지가 자욱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며 "당시로는 경영진이 변하는 혁신책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근로자들의 행사에 차량을 제공하고 경조사 참석에 빠지지 않는등
애환을 같이 하겠다는 경영진의 의식전환도 근로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이수세라믹 노사는 최근들어 마음을 터놓고 회사발전 방안을 같이
연구하는 전통을 쌓아가고 있다.

회사내에 기술지원팀을 설치,현장에서 지적하는 문제점은 공동으로
연구하고 해결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예전에는 현장의 문제가 경영진으로 연결되는 사례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요즘은 생산경보제를 채택, 매달 20일경 생산목표대비 달성량을 체크해
부족할 경우 관리부서에서 현장으로 통보하면 근로자들이 스스로 목표
달성을 위해 잔업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다.

특이한 점은 이수세라믹의 경우 매월 생산목표는 현장에서 수립해
경영진으로 통보된다는 점이다.

현장에서 최선의 생산목표를 제시하기 때문에 경영진으로서도 그만큼
수월해 지는 셈이다.

홍공장장은"우리나라 노사는 회사발전 자체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에 꼬인 문제만 풀어주면 쉽게 협력적인 관계형성이 가능하다"며
"이수세라믹도 긴 안목으로 보지못한 노사의 한때 방향착오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한다.

이수세라믹은 지난 3월 노사화합결의대회로 근로자들의 작업정신이
더욱 다져지면서 안정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92년 4백20t에 불과했던 생산량이 올해 1천만t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매출액도 1백73억원의 3배 가까운 5백5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원주 = 김희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