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경제위기가 재론되다 또 훌쩍 자취를 감추었다.

국제수지악화가 불씨가 되고 물가상승이 복병이 되어 위기설이 제기
되었으나 이를 인정하면서도 환율평가절하 등 단기정책 대신 구조개선같은
중장기대책에 힘쓰겠다는 정부발표에 그만 머리를 숙이고 만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경제는 언제든 위기설이 재론될 수 있고, 바로 이 점이 우리
경제의 특질이기 때문에 경제위기설을 가볍게 넘어가는 것 자체가 오히려
앞으로 위기를 배가시키는 어리석음임을 잊어서는 안될줄로 생각된다.

현정부가 들어선 후 그동안 그래도 경제문제가 현안으로 부상되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대기업의 투자촉진, 그것도 수입에 의한 설비투자확대가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행히도 반도체의 기술개발로 수출이 폭증,다른 수출주종품목과
함께 생산과 수출이 호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며 그 밖에 경제사정이 달라질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겉만 보고 이제 경제이슈가 없어진 것으로 착각,
다시 정쟁에 몰두하였으며 정부도 헛된 자신감에 차 생경한 개혁론을 이것
저것 부르짖으면서 일을 벌이는데 몰두, 착실한 결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제 이런 것이 쌓여 국민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가 뭐길래 튼튼한 기반없이 세계화니
OECD니 해외투자니 해외여행 자유화니 마구 열고 쓰고 벌였는지, 이것이
화근이 되어 과소비와 국제수지 등이 천정부지로 악화된 것이고 특히 WTO
라는 바깥여건 때문에 개방이 불가피하게 되자 이제농촌과 중소기업, 유통과
금융에도 개방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여태껏 우리 눈에 그리 익숙지 않은
현상이 여기저기 엿보이게 된것이다.

우리상품과 기업, 또 돈이 해외로 나가는만큼 남의 상품과 기업, 또 돈이
우리시장에 들어오는 것이 경쟁이며 공정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은 소수이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대다수가 이제 개방 때문에
국내경제 내에서도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데 과연 이런 문제를
정리하지 않은채 마구 진행하는 경제조정이 참다운 조정인지 의문시 된다는
것이다.

현정부는 지난 3년반동안 꼭 해야할 일들을 속 시원히 풀어 놓은 것이
별로 없다.

떠나가는 농촌, 허덕이는 중소기업, 뚫어지지 않는 교통, 부족한 사회간접
자본, 비싼 공단, 짜증나는 대도시, 냄새나는 환경, 위태위태한 산재,
무너질듯한 건물들, 언제 터질지 모를 노사관계, 늘어만 가는 범죄,
이그러진 사회규범, 부실한 교육제도, 찾아오지 않는 외국인 투자, 돈만
드는 과학기술, 낮아지지 않는 고비용구조 등등 모두 앞으로 돈은 들지만
풀기는 어려운 것들만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들은 여태껏 경제발전의 족쇄노릇을 했지만 앞으로는 더욱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역작용을 할 것이 틀림없다.

통계청의 최근 발표자료에 따르면 지난 35년(60~95년)간 GNP는 200배,
수출은 2,500배 느는 등 경제규모가 크게 확대되었으나 반면 이것 때문에
발생한 역효과도 비례하여 커지고 있다.

즉 인구가 두배, 총외채가 600배, 물가는 20배나 증가한 것 등이다.

그밖에도 환경오염, 교통난, 안전부재, 범죄, 가정파괴 등은 나빠질대로
나빠지고 있다.

정보통신사업이나 월드컵,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개최 등으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악화된, 또 막바지에 이른 사회 경제적 여건을
돌이키는데는 역부족이며 나아가 21세기를 맞이할 바람직한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정치는 막바지에 가서 벼랑끝 협상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는 그렇지 않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는 자세가
그립다.

우리는 여태껏 평상시에는 안이하게 대충대충 하다가 위기가 닥치면 그때
가서 정신나간 사람인양 소란 떨고, 그러다 조금 나아지면 다시 안이해지는
나쁜 버룻이 있고, 그간 미루어온 경제현안들이 사실 모두 이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젠 이런 것들은 개방과 더불어 막바지에 왔고 쓰러지느냐
없어지느냐 하는 고비에 처하게 됐다.

지금부터라도 하루하루, 미리미리, 이름 밝히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기둥이 되고 바탕이 되는 개혁이 당장 요청된다.

남은 기간동안이라도 이젠 새로운 것을 더 벌여 놓기보다 이미 착수한
몇가지가도, 예컨대 교육과 과학기술이라도 끝을 잘 맺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지금부터의 개혁은 다음 정권이 폐기처분할, 또 쓸데없이 오히려 부담만
늘리는 개혁이어서는 안되며 지금까지 남이 해 놓은 것을 마구 부수어
버리는 것과도 달라야 한다.

어느 것이든 상충과 조화를 찾아야 하는 어려운 일들뿐이라고 해도 그런
개혁을 지금 당장 진행해야만 한다.

이런 것이 참다운 개혁이며 이것을 맡아 말끔히 처리할 수 있는 능격과
리더십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생경한 개혁이 아닌, 성장하면서도 기반을 튼튼히 하는 현실적인 개혁이
착실히 이루어질때 비로소 경제위기가 재론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