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터닝 포인트는 해외 생산기지의 건설이다.

생산 거점을 한국에서 오대양 육대주로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제2의 반도체 기적을 겨냥해 전 지구적 생산체제 구축에 나선 것.

해외 생산시대라는 신세기를 가장 먼저 열고 있는 업체는 현대전자다.

현대는 올초 미국 콜로라도주 유진시에 16메가D램 공장을 착공했다.

8인치 웨이퍼를 월 2만장 가공할 수 있는 규모다.

이 공장 말고도 미국에 2개의 생산라인을 더 건설키로 했다.

미국뿐 아니다.

유럽에도 동남아시아에도 공장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오는 2000년까지 해외에 반도체 공장 5개를 짓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이 뿐 아니다.

"앞으로 매년 해외에 공장을 하나씩 착공하겠다"(정몽헌 현대전자 회장)는
장기 플랜도 세워놓고 있다.

삼성전자도 뒤지지 않는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에 역시 8인치 웨이퍼를 월 2만장 가공할 수 있는
규모로 공장을 짓고 있다.

현대보다 착공은 한달정도 뒤졌지만 이 지역에 생산라인을 두개 더
깔겠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회사는 영국 윈야드 복합단지에도 공장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삼성의 해외 생산기지 건설 계획중 눈에 띄는 것은 비메모리 분야의
생산기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삼성은 빠르면 이달중 중국 소주에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공장을 세운다.

미국 공장중에도 한 개 생산라인은 비메모리용으로 짓기로 했다.

LG반도체도 올해안에 말레이시아에 64메가D램 생산공장을 착공한다.

영국에는 256메가D램 공장을 짓는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세워 놓았다.

새로 반도체 사업에 진출키로 한 대우전자는 싱가포르 영국등에 비메모리
생산공장을 건설키로 하고 합작업체와 막바지 협상중이다.

조립업체인 아남도 필리핀에 한개 공장을 추가로 세워 이 지역에서만 4개의
공장을 가동하는 한편 이스라엘에도 생산기지를 건설키로 했다.

국내업체들이 해외 생산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국에서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 외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생산은 물론 마케팅 기술개발등 전 사업분야에 일대 혁신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사실 국내업계의 반도체 사업 방식은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우선 상대적으로 기술과 생산 방식이 단순한 메모리 반도체를 집중 생산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 업체에 가장 알맞는 사업 분야"라는 일본
업체들의 조롱도 사고 있다.

또 R&D(연구개발)체제도 단절형 구조를 갖고 있다.

반도체란 본래 TV, PC 등 세트제품과 함께 개발되는 게 원칙이다.

세트제품의 성능을 결정하는게 반도체이기 때문이다.

"실과 바늘"의 관계로 표현되는 두 분야를 따로 떼어서 개발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 얘기다.

그런데 국내 반도체 산업은 이같은 연결형 R&D체제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같은 전근대적 사업 방식을 해외생산기지 건설로 전환시키겠다는 게
국내업체의 생각이다.

국내업체들이 노리는 것은 우선 R&D의 글로벌화다.

미국 유럽등의 첨단 반도체 업체들과 공동 개발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 현지의 우수인력을 이용해 기술경쟁력을 갖춘다는 것.

이는 LG반도체가 해외 생산기지 건설과 보조를 맞춰 세계 15개 지역에
R&D 기지를 건설키로 한데서 엿볼 수 있다.

LG는 올초 영국을 시작으로 대만 미국 일본등 대형 수요 업체가 있는 곳에
R&D기지를 구축할 계획이다.

"새로운 제품을 요구하는 수요업체와 공동개발체제를 구축한다면 국내
반도체 업계의 최대 약점인 시스템 기술과의 연계로 기술개발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LG반도체 구자학 회장)는 것.

삼성이나 현대는 현지 우수인력을 적극 채용한다는 생각이다.

삼성은 미국 반도체 생산기지로 텍사스주 오스틴을 선택한 이유를 한마디로
"이 지역이 남부 실리콘 밸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스틴시에 있는 텍사스 주립대학은 반도체에 관련된 물리학 등이 매우
강하다.

또 여기에는 미국의 민.관 합동 연구기관으로 세계 반도체 업계의 기술
개발을 사실상 리드하고 있는 세마테크가 있다.

"세마테크와 공동연구체제를 구축하고 텍사스 주립대학의 우수인력을
채용한다면 세계적인 기술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될 것"(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이란 속내평이다.

현대전자는 지난 94년 사들인 비메모리 전문업체인 미국 심비오스 로직사와
연계한 기술개발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

국내업체들은 해외 생산기지 건설로 수요자 중심의 마케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수요자의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킬 수 있는 유저 프랜들리(user friendly)
전략을 펼칠 수 있다는 것.

"유저 프랜들리야 말로 앞으로 국내업체들이 지향해야할 마케팅 방식"
(정회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수요업체들은 납기를 1주일 이내에 맞춰주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수요 업체 바로 옆에서 생산하지 않는한 불가능한 일이다"(반도체
산업협회 김치락 부회장).

국내 업체들은 수요 업체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함으로써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하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한국 업계가 경쟁적으로 해외로 나가는데 대한 우려의 시각도 많다.

너무 한꺼번에 많은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

"일본 기업들의 경우 대개 단독투자가 아닌 합작투자를 하고 있다.

조단위의 투자를 단독으로 하기에는 사실 부담이 큰 게 아니냐"
(전자산업진흥회 관계자)는 것.

사실 반도체 공장을 하나 짓는데는 1조원이상이 들어간다.

지금처럼 시장상황이 나쁠 경우 엄청난 돈을 외국에 버리는 셈이다.

일본업체들은 이런 가능성을 고려해 합작투자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투자 리스크를 줄이자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업체는 LG반도체의 말레이시아 공장을 제외하곤 전부
단독투자다.

잘되면 대성공이지만 만에 하나 시장이 안좋아진다면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국내 업계는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를 향해
큰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목표점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업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내업계가 해외 생산기지를 발판으로 또다른 반도체 기적을 만들어 낼지
두고 볼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