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당한 선조가 왜군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서북지방으로
피난했다가 환도한 것은 1593년10월이었다.

궁궐하나 제대로 남은 것이 없이 초토화된 한양에 돌아온 선조는
정능동에 있던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았다.

당시 "정능동행궁"으로 불렸던 이곳이 지금의 덕수궁이다.

선조가 이곳에서 승하하고 그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이 행궁을 "경운궁"이라고 이름짓고 7년동안 이곳에 머물다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뒤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켰던 탓으로
한때 경운궁은 "서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작은 별궁정도로 축소됐던 경운궁이 지금처럼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된것은 조선왕조가 열강들의 각축속에 시달리던
1897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부터였다.

덕수궁안에 서양식 석조전이 건립된 것은 1910년의 일이다.

1907년 제위를 순종에게 물려준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고 계속 이곳에서 머물다가 이곳에서 승하했다.

덕수궁은 이처럼 400여년의 긴역사를 지닌곳이다.

특히 한말 약10년간은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역사의 무대였던 곳으로 규모는 작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다른 큰
궁궐보다 더 친숙한 곳이다.

한국의 5대궁중의 하나인 덕수궁이 6.25때 서울탈환작전과정에서
미군의 포격으로 하마터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번 했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전사에도 없는 이비화는 6.25참전용사인 제임스 해밀턴 딜씨(69)가
쓴 "폭파위기의 덕수궁"(국방군사연구소간)이란 수기에서 처음 공개됐다.

당시 포병관측 장교로 참전한 딜씨는 수기에서 1950년9월 덕수궁에
집결해 있는 괴뢰군을 섬멸하기위해 포격을 해야할 급박한 상황에서
적이 덕수궁을 빠져나와 을지로로 이동한후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한국인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살린일을 "가장 자랑스럽고
흐뭇하게 여긴다"고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한 국가의 문화유산을 "포격개시"란 말
한마디로 불과 몇분안에 사라지게 하는 것은 양심이 허락치 않아
동료인 앤더슨대위와 사의한뒤 적이 덕수궁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려
포격한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해 놓았다.

또 그는 "그날 그 시점에 가졌던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수 없는 일"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문체부가 제임스 해밀턴 딜씨에게 애틀란타 현지에서 감사패를
전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전화속에 피어났던 꽃 한송이를 46년만에야 대하는듯 반가운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