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숙 <중앙대 교수 / 한국영화연 소장>

언젠가 미국인들에게 한국영화를 보여주고 토론을 진행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이었고 한국을 미국에서 바르게 소개하는데
어느정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기획한 측에서는 그들에게 "씨받이"같은 우리의 전통적인
무엇인가를 보여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영화는 현대 서울 변두리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줄수 있다고 여긴 "우묵배미의 사랑"이었다.

그 미국인들은 영화를 아주 흥미있게 보았다.

경주의 유적지들, 산업시설들, 그리고 서울의 중심부만 돌아본 그들에게
영화에 등장하는 서울의 뒷골목이나 변두리의 그림들은 좀더 생생한 한국의
모습으로 보였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한 남성이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저렇게 패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냐고.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때 내가 그 당혹스런 질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럽게도
(?) 영화 속에 거세고 힘센 아내가 남자주인공을 패는 장면이 있었던
탓이었다.

여성도 남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무언가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느냐는 변명으로 말이다.

이후 자연스럽게 우리 영화를 더욱 유심히 보게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폭력이 흔했다.

영화제 심사를 하면서 우리 영화 1년치를 볼때 더욱 놀라웠다.

폭력물도 아닌 진지한 영화들에서도 여성 폭력은 정말 흔했다.

특히 성폭력은 우리 영화사의 초기부터 "순수한" 조선반도에 대한
은유로 가장 흔하게 쓰여지고 있다.

그 은유의 확장된 의미는 최근의 "꽃잎"까지 지속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열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지금 다시 그 몇년전의 경험을 되새김하는 것은 최근 유쾌하게 웃고
싶어서 본 "투캅스2"가 결국은 불쾌한 경험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 폭력을 남용하는 것이 두군데서 보인다.

하나는 고지식할 정도로 정의롭고 유능한 신참 형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고참이 술집업소의 여자를 미끼로 이용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신참은 고참의 기대를 완전히 망가뜨린다.

여자에게 오히려 과도한 성행위를 가함으로써 남자는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끈질기게 행위를 가하고 여자는 제발 그만하자고 애원을 한다.

보기에도 처참할 지경이다.

또 한 장면은 여성이 칼로 난자당한 사건의 현장묘사이다.

여성의 상체는 노출된 채 유두까지도 난자당해 있고 신참 형사는
역겨워하는 고참 앞에서 흐르는 피를 맛보며 범행시간을 추리한다.

그렇게 잔인하게 여성의 몸을 난자해가면서 영화가 묘사하는 것은
간단하다.

고참이 걸어놓은 함정을 유유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신참의 모든 면에서의
유능함 정의로움 강인함 담대함 등 긍정적인 남성적 가치관들인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없이도 가능한 이 장면들을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너무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의
여성에 대한 인식,나아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가 정말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국민영화"라고까지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 영화가 품고있는 여성에 대한 태도가 그저 일상적인 것으로 사람들
머릿속에 새겨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매맞는 여성의 모습이 그저 한국의 보편적인 양태 중 하나로
더 널리 퍼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