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일제 강점기에 나서 자란 사람들의 체험이나 추억이란 대개 엇비슷할
것이다.

내가 초등 교육을 받던 시절에는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하고
"창씨 개명"과 "국어 상용"을 강요하여 그나마 명목상으로 있던 "조선어"
과목도 폐지된 뒤라 일본어만으로 수업을 했다.

그러니까 집에서는 우리말을 하면서도 학교에서는 늘 일본어만을 쓰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이 막바지에 들면서 국방 헌납이나 헌금이다 하여 놋그릇까지
죄다 거두어 갔는가 하면 대용품 시대라 하여 신발 뒤축도 벚나무로 깎아
쓰도록 장려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도 내가 보낸 어린 시절이 남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책읽기와 장난감
놀이 등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물론 만화책도 많이 보았지만 친가와 외가의 삼촌들이 보던 "라디오와
음향" "무선과 실험"에다 삼촌들이 사준 "소년 구락부"같은 일본 잡지에서
만화 탐정소설 위인전 과학기사들을 열독하던 기억이 있다.

아마 내가 친외가를 막론하고 첫손자였다는 데에서 받을 수 있는 특혜였을
것이다.

또 조부모님 덕에 개화된 환경에서 자라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시계
유성기 카메라 활동사진기 라디오 전축같은 인공물들을 가지고 놀수 있었다
는 것 또한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나는 분에 넘치는 이 장난감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막연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들을 품게 되었다.

이 시계는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가, 전파는 어떻게 오고 가는가, 소리는
어떤 기계 장치로 재생되는가.

이같은 호기심은 결국 닥치는 대로 물건을 분해하게 만들었다.

물론 분해된 물건의 상당 부분은 재조립에 성공하지 못하고 수리도 할수
없는 폐품이 되기 일쑤였다.

그 목록에는 할아버지께서 아끼시는 회중 시계도 있었다.

심지어는 촛불을 켜놓고 공작을 하다 방을 비운 사이에 불을 낸 적도
있었으니 나의 과도한 집착은 모름지기 기물 파손은 물론 어른들의 정신적인
부담까지 포함해서 자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크고 작은 일을 저지를 때마다 어른들께서는 크게 노하지
않으시고 참을성 있게 적절한 꾸지람을 하심으로써 나의 호기심과 집착을
가로막지는 않으셨다.

나는 지금도 철부지 자식의 지나친 행동을 어린 과학자(?)의 주변 사물에
대한 관심으로 여기며 끝까지 너그럽게 키워 주셨던 부모님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세월을 거듭할수록 어려워지기만 하는 훌륭한
부모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비교적 명쾌한 답 하나를 얻는다.

곧 좋은 책도 좋지만 질이 좋은 장난감을 갖고 놀도록 해주라는 것이다.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놀이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

나는 그 나라의 장난감을 보고 그 나라의 산업수준을 평가한다는 척도를
믿는다.

아이들은 늘 꼼지락거린다.

방구석에서, 나무그늘 아래서, 하교길에서 끊임없이 주위의 사물에 대해
궁금해하고 무엇인가 만지작거리면서 그들은 자란다.

나 역시 그 시대 그 나라의 어려움과 어른들의 고통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두리번거리고 부스럭거리는 이른봄의 새싹처럼 그렇게 조금씩 성장했으며
그 속에서 나의 호기심은 다행스럽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그때 큰 몫을 한 것이 광석 수신기였다.

당시는 라디오가 제한적으로 보급되어 집집마다 라디오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전국 광석화라고나 할까, 부품을 구해다가 조립하는 광석 수신기는
무선에 취미가 있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라디오가 없는 집의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나의 삼촌들 역시 이 광석 수신기의 조립에 열을 올렸다.

삼촌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나는 어깨너머로 광석 수신기의 조립 기술을
틈틈이 익혔다.

당시의 광석 수신기는 지금처럼 상품화된 반도체 다이오드로 검파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에 실려 온 방송 내용을 자연 방연광으로 찾아내는 원시적
인 장치였다.

또 소리도 스피커가 아니라 전자석과 진동판으로 된 무거운 리시버(수화기)
를 머리에 쓰고 듣도록 되어 있었다.

이른바 "고양이 수염 전극(cat"s whisker"이라고 부르는 가늘고 유연한
강철선을 팥알만한 방연광 결정 표면을 오가며 방송이 잡힐 때까지
조심스럽게 찾아내야 하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때에도 라디오 부품점에서는 고정 광석이라고 하여 결정표면이 양호한
부분을 골라내어 일정 압력의 스프링(수염 전극)이 달린 강철사 끝을 접촉
시켜 연필보다 좀 굵은 통 속에 왁스 등으로 밀봉한 것을 비싸게 팔고
있었다.

서구사회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부터 광석 수신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물론 플레밍(John Ambrose Fleming,영 1849~1945)에 의해 발명된
2극관과 드포레(Lee deForest,미 1873~1961)에 의해 발명된 3극관 때문
이었다.

그 대신에 광석 수신기는 무선 수신기의 기본 원리 학습에 관심을 가진
어린 무선 애호가들의 차지가 되었다.

광석 수신기의 전성시대는 끝이 났지만 진공관의 등장으로 수신 감도가
높아져 개인도 단파 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군사 목적이나 해외동향을 살피는 용도로서 단파에 대한 관심과 가치는
한층 더 부각되었다.

광석 수신기에서 어지간히 진을 뺀 나는 좀더 어려운 기술에 도전했다.

바로 진공관 라디오의 조립에 나선 것이다.

진공관은 무선 전파 신호를 증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피커를 울릴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전지용 진공관으로 재생식 저주파 증폭 1단 진공관 1구 라디오(0-V-1)의
제작에 성공한 나는 마그네틱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중파 방송을 들으며
흥분에 떨었다.

이 시기의 기억에 한 가지 덧붙인다.

진공관 라디오 조립에 성공한 비결은 원리도 모른채 삼촌들이 보는 무선
잡지에 실린 제작 기사와 회로도를 그대로 따라서 조립했다는 데에 있었다.

원리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잡지 기사를 따라서 조립을 해도 성공할 만큼
오류나 잘못된 그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대단하게
여겨진다.

오늘날 일반 도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어린이들이 보는 과학 잡지의
실험 기사에 잘못된 표현이나 오류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한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1945년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다.

그 무렵 서울에 있는 국민학생들은 전쟁 막바지에 내려진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모두 근교의 절간이 아니면 친척이 있는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소개된 학생 가운데 하나였던 나는 다른 학생들처럼 해방이 되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그 이듬해에 휘문중학교에 들어갔다.

다행히 틈틈이 어머니로부터 배운 이른바 언문(당시는 한글을 낮추어서
이렇게 불렀다) 실력으로 한글 수업에 어려움은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취미 생활은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조금씩 무선의 세계에 매력을 느낀 나는 전파를 이용하여 온 세계의 방송을
듣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 때부터 시작된 아마추어 무선 활동은 내 평생의 취미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지구상 어느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도, 그것이 심지어 달이나
화성의 표면에서 보내오는 정보일지라도 안방에 앉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로
시청할 수 있는 것은 모두 19세기 말에 발견된 전파 덕분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무선 통신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열중했다.

위인전에 나오는 수많은 과학자 중에서 파라데이(Michael Faraday,영
1791~1867)와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영 1831~1879)은 어린 나를
매료시키고 평생 흠모하게 만들었다.

파라데이는 직관과 실험을 바탕으로 자기장과 전기장의 유도 현상을 규명
하고 이때에 태어난 맥스웰은 이들을 수학적으로 정리, 통합해서 이론
체계를 만들었다.

전자기파의 존재를 예언한 파라데이와 맥스웰 두 천재의 전기는 몇번을
되풀이해서 읽어도 내게 늘 새로운 감명을 주었다.

이와함께 나의 취미벽은 점차 그 강도를 더해 갔다.

진공관 1구 라디오 제작에 성공하자 이번에는 방송국간의 혼신을 피하기
위해 곧 분리가 더 잘되게 하기 위해 고주파 1단을 부가한 전지식 진공관
라디오(1-V-1)를 제작했다.

그러나 전지 소모가 너무 빨라 나를 실망시켰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몇번이고 충전해서 쓸 수 있는 축전지가 없었던
시절의 얘기다.

중학교 1학년 가을에는 전지가 필요없는 엘리미네이터식, 즉 교류전원식
1-V-2로 개조하고 단파를 추가하여 갈망하던 2밴드 수신기를 완성함으로써
나의 청취 범위는 단파대에까지 이르렀다.

그즈음 가정에 보급됐던 병3형(0-V-0), 병4형(0-V-2), 고1형(1-V-1)의
스트레이트형 수신기는 진공관들의 내용 수명이 다하여 감도가 크게
떨어지고 재생 검파식이라 발진이 일어나 방송국을 바꿀 때마다 조정을
다시 해야 했다.

따라서 서울중앙방송(HLKA)을 포함한 국내 라디오 방송과 미군의 극동
지역 방송망인 베가본드(WTAW)를 혼신없이 청취하려면 가정용 수신기를
슈퍼 헤테로다인으로 개조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대망(?)을 품고 필요한 부품 수집에 나섰다.

또 한편으로는 친척이나 이웃의 낡은 가정용 수신기를 수리해 주거나
주파수 분리가 잘 되는 고주파단을 추가해 주기도 했다.

그덕에 나는 집 안팎의 고물을 수집하는 고물상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 대가로 받은 사례비는 부품 구입비에 보탰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