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파키스탄'] 부토 총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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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천사" "파키스탄의 아키노" "동방의 딸"
회교국 첫 여성총리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에게 붙은 이 별명들은
부토총리의 삶의 역정을 그대로 설명해 주고 있다.
아버지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파키스탄 총리가 군부의 손에 처형당한뒤
복수의 화신으로 나선 부토총리는 민주화기수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뒤
이제는 파키스탄의 경제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부토총리의 삶은 그야말로 그리스 고전에 등장하는 한편의 드라마 같다.
지난 53년 신드주의 대지주집에서 태어난 부토총리는 카라치 저택에서
영국인유모의 손에 자랐다.
명문가 자녀가 그렇듯 부토총리도 가톨릭 수녀학교를 나와 16세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드 대학에서 정부학을 공부한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으로 옮겨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토총리는 수줍음을 잘 타고 사과주스와 페퍼민트
아이스크림을 즐기던 이슬람 전통의 폐쇄적인 여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옥스퍼드재학시절에는 남자들과 마주칠까봐 세탁실에도 함부로 가지 못했을
정도다.
그러나 79년 부토여사의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지아 울 하크 군사정권에 의해 처형당하면서 부토총리의 삶은 투쟁의 연속
이었다.
당시 나이는 24세.
그후 30대초반까지 부토총리의 젊은 시절은 독방생활과 가택연금, 망명으로
얼룩졌다.
86년 아버지의 원수 지아 전파키스탄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사고로 숨지고
11년간의 군부 철권통치시대가 마감되면서 부토여사는 귀국한다.
그녀는 인민당 총재에 취임, 민주화의 선봉에 서서 맹렬한 반정부 운동을
펼친 결과 마침내 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재임 2년만인 90년 8월 그녀의 정적 칸 대통령은 부패와 권력남용을
이유로 내각을 해체하고 그녀를 총리직에서 몰아낸다.
다시 야당투사로 돌아선 부토총리는 3년간의 권토중래끝에 지난 93년 10월
총리직을 되찾았다.
지난 87년 34세의 나이에 부유한 기업가 아시프 자르다리씨와 결혼한
부토여사는 총리 재임중 둘째 아이를 낳아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4일자).
회교국 첫 여성총리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에게 붙은 이 별명들은
부토총리의 삶의 역정을 그대로 설명해 주고 있다.
아버지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파키스탄 총리가 군부의 손에 처형당한뒤
복수의 화신으로 나선 부토총리는 민주화기수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뒤
이제는 파키스탄의 경제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부토총리의 삶은 그야말로 그리스 고전에 등장하는 한편의 드라마 같다.
지난 53년 신드주의 대지주집에서 태어난 부토총리는 카라치 저택에서
영국인유모의 손에 자랐다.
명문가 자녀가 그렇듯 부토총리도 가톨릭 수녀학교를 나와 16세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드 대학에서 정부학을 공부한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으로 옮겨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토총리는 수줍음을 잘 타고 사과주스와 페퍼민트
아이스크림을 즐기던 이슬람 전통의 폐쇄적인 여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옥스퍼드재학시절에는 남자들과 마주칠까봐 세탁실에도 함부로 가지 못했을
정도다.
그러나 79년 부토여사의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지아 울 하크 군사정권에 의해 처형당하면서 부토총리의 삶은 투쟁의 연속
이었다.
당시 나이는 24세.
그후 30대초반까지 부토총리의 젊은 시절은 독방생활과 가택연금, 망명으로
얼룩졌다.
86년 아버지의 원수 지아 전파키스탄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사고로 숨지고
11년간의 군부 철권통치시대가 마감되면서 부토여사는 귀국한다.
그녀는 인민당 총재에 취임, 민주화의 선봉에 서서 맹렬한 반정부 운동을
펼친 결과 마침내 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재임 2년만인 90년 8월 그녀의 정적 칸 대통령은 부패와 권력남용을
이유로 내각을 해체하고 그녀를 총리직에서 몰아낸다.
다시 야당투사로 돌아선 부토총리는 3년간의 권토중래끝에 지난 93년 10월
총리직을 되찾았다.
지난 87년 34세의 나이에 부유한 기업가 아시프 자르다리씨와 결혼한
부토여사는 총리 재임중 둘째 아이를 낳아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