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은 설반처럼 무식하게 유상련에게 접근하지 않고 우선 유상련이
노래 부른 "목란정"에 관해 대화를 나눔으로써 제법 고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상련이, 노래 잘 들었네. 근데 두여랑이 꿈속에서 유몽매를 만나고
나서 왜 갑자기 병이 들어 스스로 자화상을 그려놓고 죽었는지 이상하단
말이야"

"그건 일종의 상사병이었겠지요"

유상련이 두여랑의 마음을 깊이 읽고 있다는 듯 자신있는 어조로
대답하였다.

"허, 꿈속에서 본 사람까지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사랑하다니"

"두여랑은 먼 훗날, 자기가 죽은 후에도 유몽매와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하였지요.

그래서 자화상을 그려 매화관에 놓아둔 거지요.

유몽매가 언젠가는 매화관에 와서 그 자화상을 보도록 말입니다.

결국 유몽매는 두여랑의 자화상을 보고 상사병에 걸리게 되지요.

꿈속에서 유몽매를 보고 상사병에 걸린 두여랑이나 두여랑의 자화상을
보고 상사병에 걸린 유몽매나 피장파장이지요"

가진과 유상련이 "목란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고 있던 보옥이
자기도 한마디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였다.

그래서 보옥도 유상련 곁으로 다가앉아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남녀간의 사랑은 꿈과 현실을 초월하고 삶과 죽음 초월하는 모양이지요"

보옥 역시 꿈속에서 경환 선녀의 여동생 겸미를 보고 한동안 상사병
비슷한 증상을 앓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이승과 저승을 초월하여 언홍의 혼백과도

교합하지 않았던가.

삶과 죽음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보옥은 일찍 죽은 진가경과
그 동생 진종이 문득 그리워졌다.

가용의 아내 진가경은 바로 보옥이 꿈속에서 보았던 겸미를 닮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유상련 옆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가진이 며느리인
진가경을 건드려 아까운 나이에 화병으로 죽게 한 것이었다.

한량처럼 놀기를 좋아했던 보옥의 친구 진종은 유상련의 친구이기도
했다.

"상련이, 진종의 무덤에는 종종 가보는가?"

"그럼요.

지난 번에 비가 많이 내려 진종의 무덤이 비에 씻겨 내려가지나 않았나
하고 친구들과 매사냥을 가는 길에 들러보았지요.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한 귀퉁이가 무너져 있더라구요.

그래서 사흘 후인가 두사람의 인부를 사서 진종의 무덤을 고쳐놓았지요"

"아, 그랬군. 나도 그때 염려가 되어 진종이 생전에 좋아했던 연밥을
대관원 연못에서 몇개 건져올려 하인들에게 주면서 진종의 무덤에 한번
갔다 와보도록 했지.

그런데 하인들이 돌아와서 누가 진종의 무덤을 깨끗이 보수하여 단장해
놓았더라고 하더군.

바로 상련이가 그랬었군"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5일자).